top of page

적막에 싸인 학생회실. 긴 타원형 책상에 앉은 채은은 똑딱거리는 벽시계 소리에 자꾸만 귀를 기울였다. 똑, 딱, 똑, 딱. 일정한 간격으로 맑은 소리를 내는 시곗바늘은 지칠 줄도 모르는지 똑딱똑딱 쉬지 않고 잘도 움직였다. 눈앞의 글자들은 마치 고대 문자처럼 아득했다.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왜 읽을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여기서 나보고 뭘 어떡하라는 거지. 종내 채은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잡념은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법이었다. 망상 속에 빠져들기 그 직전이었다.

타이밍 좋게 마주앉은 남학생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그녀의 과외 선생을 자처한 허묵이었다. 샤프펜슬을 쥔 채은의 오른손이 한 곳에 오래 멈춰 있는 것으로 그녀의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문제가 어려워?”

“…네.”

“다시 한 번 설명해 줄까?”

끄덕끄덕. 채은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자, 허묵이 문제집을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자, 여기서는 A의 여집합을 구해서 이걸 응용하는 거야. 알겠어? 그렇게 물어보면 채은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채은의 대답을 확인한 허묵은 마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허묵의 손이 문제집에 공식을 빠르게 적어 내렸다. 정갈한 글씨체가 주인을 닮아 깔끔했다. 채은은 그의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선배, 글씨 예쁘다.

“집중하고 있는 거 맞아?”

“…아, 물론이죠! 잘 보고 있어요.”

“그래? 그럼 그 옆에 있는 문제 풀어봐. 숫자만 다른 비슷한 문제야.”

망했다.

 

허묵이 다시 문제집을 그녀에게 슬쩍 밀자, 채은은 곤란한 부탁을 받은 사람마냥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허묵은 이번에는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아예 몸을 뒤로 빼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수학 문제를 한 번 보던 채은의 시선은 자연히 허묵에게로 향했다. 애처롭게 저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허묵은 모른 척했다. “잘 봤다며. 그럼 풀어봐야지.” 동정표가 먹히지 않는다 이거지. 채은의 고개가 자연히 문제집 쪽으로 떨구어졌다.

기초 문제를 수능 30번 문제마냥 붙잡고 있는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가만히 응시하던 허묵은 처음 그녀에게 수학을 가르쳐줬던 날을 떠올렸다. 루트를 이용한 문제에서, 채은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었다. ‘선배, 루트는 왜 씌우는 거예요…? 추워서 씌우는 건가…?’ 정말이지 기가 막힐 말이었다.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은 허묵이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봐, 아까 잘 안 봤지.”

“…네에.”

“채은아.”

 

제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채은이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굳는 듯한 느낌이었다. 적당히 낮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면, 온갖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는 탓이었다. 허묵은 짧게 한숨과 함께 질문을 토했다.

 

“하기 싫어?”

 

그리 공격적인 어투는 아니었건만, 정곡을 제대로 찌른 모양인지 채은이 눈꼬리를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허묵의 옆에 쌓여있는 온갖 참고서들로 향했다. 본인이 공부해야 할 시간까지 쪼개 가면서 제 공부를 도와주는 그에게 순간 미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게다가 허묵은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주목하는 우등생이었다. 선배의 귀중한 시간을 내가 헛되게 만들어도 되는 걸까? 고개를 숙인 채은이 이윽고 고개와 눈을 살짝 들어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응.”

“수학 싫어요.”

 

그럴 줄 알았다며 허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곧 제 옆에 있던 공책 중 한 장을 찢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텅 비어있는 무지 노트였다.

 

“그럼 뭐 하고 싶은지 적어봐. 아무거나 다.”

“네?”

“문과를 갈지, 이과를 갈지. 아니면 예체능에 생각이 있는 건지. 그게 아니면 나중에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 대충이라도 좋고 뭉뚱그려 써도 좋으니까 생각나는 대로 다 적어줘.”

“선배.”

“하고 싶은 걸 해야지, 하고 싶지도 않은 걸 억지로 붙잡는다고 해서 그게 갑자기 되진 않잖아.”

 

30분 줄게, 적고 있어. 그리 말한 허묵은 제 볼 일은 끝났다는 듯 자기 몫의 공부를 시작했다. 그 어렵기로 소문난 문제집을 술술 푸는 모습은 이 와중에도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멋있었다. 허묵의 정수리에 그녀의 시선이 열렬하게 쏟아졌으나, 허묵은 아랑곳 않고 문제를 푸는 데에만 전념했다. 채은은 당장이고 그의 곁으로 가 단정하게 잘 빗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애써 잘 참아냈다.

그나저나, 난 뭘 써야 하는 거지. 백지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채은은 이윽고 샤프펜슬을 다시 고쳐 잡고 그 위에 가지런히 글자들을 나열했다. 문과, 예체능, 문예창작학과. 단 세 단어로 막연하게 시작한 글의 첫머리는 정해진 시간이 임박할 즈음엔 다행히도 종이 한 장에 거의 빼곡하게 채워졌다. 삼십 분의 시간이 지나자 허묵의 앞에 놓인 스톱워치가 울었다.

 

연필을 내려놓은 허묵이 그녀의 앞에 놓인 종이를 제 쪽으로 빼냈다. 채은은 제가 쓴 두서없는 글들을 읽는 허묵을 응시하며 손톱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딱히 진중한 고민을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수학은 해야 한다며 다시 수학 숙제를 내는 것은 아닐까, 뭐 그런 생각 중이었다. 빠르게 그녀의 글을 훑은 허묵은 종이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글 쓰고 싶은 거야?” 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담임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순간 느낌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도서관에서도 맨날 글 쓰고 있어서 좀 궁금했는데.”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다는 듯 허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녀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려는 태도는 아니었다. 허묵은 종이 이곳저곳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문과 갈 것 같고…, 그럼 언어 위주로 가르쳐줘야 하는 건가.” 그의 작은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듣던 채은이 즉각 대답했다.

“언어는 괜찮아요. 나름 잘 나오는 편이라.”

“그래? 그럼 영어 할래?”

“…네?”

“싫은가 보네.”

 

채은의 표정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누군가를 속이는 것 자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채은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묵은 단호하게 영어와 수학 중 하나를 택하라며 어려운 선택지를 내밀었다. 채은이 금방 인상을 찌푸렸다.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요? 차라리 어떤 방법으로 죽느냐 묻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국영수 중에 하나 정도는 내가 알려줘야 할 것 아냐. 언어는 네가 잘한다며.”

“사탐도 있고, 과탐도 있잖아요! 어, 역사도 있고!”

“그건 네가 충분히 공부하면 할 수 있어. 골라. 수학, 영어.”

“…둘 다 싫으면요?”

“그럼 과외 접는 거지.”

“영어로 하죠.”

 

그리 말하며 능청스럽게 영어 문제집을 펴는 채은의 모습이 퍽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웠다. 허묵은 기가 찬다는 듯 하, 헛웃음을 치더니 곧 노트 한 면을 펼쳤다. 채은의 과외 커리큘럼이 정리되어 있는 페이지였다. 모두 허묵이 손수 적은 것들이었다. 그는 곧 ‘수학’이라 적힌 것들을 모조리 ‘영어’로 고쳐 적었다.

“그럼 앞으로는 수학 대신 영어 문제집 가져와. 수학 안 하는 대신 두 배로 할 거야. 학교 시험은 참고서에서 거의 다 나오니까 그것만 파면 될 것 같고.”

“네에.”

“정쌤이 작년에 출제했던 문제는 내가 아직 가지고 있어. 다음 주엔 그것도 빌려줄게. 풀어와.”

“네에, 네.”

채은이 그의 말을 열심히 플래너에 받아 적었다. 허묵의 말에 연신 대답하는 채은의 목소리가 아까보단 밝아져 있었다. 영어도 그다지 좋아하는 과목은 아니었으나, 아무렴 수학보다는 백배는 나았다. 허묵은 다음 주까지 영어 문제집 한 챕터를 풀어올 것을 숙제로 제시했고, 채은은 어렵겠지만 해 보겠다며 당돌하게 대답했다. 허묵이 몸을 일으켜 채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보단 기분 많이 나아진 것 같네.”

“수학만 아니면 돼요, 사실.”

“널 누가 말려.”

허묵의 웃음소리가 채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소리였다. 머릿속 깊은 곳에 녹음해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듣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채은의 온 정신은 허묵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해지겠지. 채은이 널브러진 문제집들을 한 곳에 모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려고?”

“네, 선배도 공부해야 하잖아요. 저랑 같이 있으면 공부하기 힘들다면서요.”

“배려해주는 거야?”

“…조금? 선배 오늘 제가 속 좀 썩이기도 했고.”

“알긴 아네. 오늘자 과외비는 두둑하게 받아낼 거야.”

채은이 힛, 수줍게 웃었다. 제 자리를 정리한 채은이 허묵의 옆자리로 옮겨가 앉았다. 그와의 거리가 확, 가까워지자 채은의 심장이 뛰는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다. 시계는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데, 심장은 때에 따라서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곤 했다. 심장도 시곗바늘과 같다면 좋을 텐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학생회장님께서 그걸 신경 쓴 적은 몇 번 없으신 것 같은데 의외네요.”

“이젠 놀릴 줄도 알고?”

“선배도 나 놀리면서!”

곧 채은의 입술이 허묵의 볼에 가 닿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어쩐지 중첩되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배의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아. 채은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단정한 그의 얼굴이 채은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심장소리와 맞먹을 정도로 빠르게 깜빡였다.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외모였다. 한편 채은의 콧대를 검지로 한 번 건들인 허묵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더 해줘.”

“…….”

“내 과외 비싸.”

“풉.”

저런 농담도 칠 줄 알고. 인터넷 소설에 나올 법한 대사에 채은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채은은 그의 양 볼에 다시 입을 맞춘 후,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요, 오늘 제가 좀 민폐이긴 했으니까.”

“…….”

“오늘도 고마웠어요, 과외 선생님.”

이윽고 채은의 입술과 허묵의 입술이 같은 지점에서 맞닿았다. 허묵이 그녀의 고개를 잡으면 채은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어깨 위에 제 두 팔을 얹었다. 어느 오후 자습시간의 은밀하고 달큰한 입맞춤이었다. 청명한 낮의 햇살이 창가의 하얀 커튼을 한 번 지나 은은하게 그들을 비추었다. 채은은 이 순간, 어쩐지 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를 잠시 멈추기를 바란 것 같았다.

 

*

 

교실로 돌아온 허묵은 자리에 앉아 두꺼운 책들을 서랍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자습이 한창인 2학년 교실엔 정적이 가득 내려 있었다. 교실을 한 번 크게 둘러본 허묵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플래너를 펼쳤다. 펼친 페이지 위엔 예쁘게 반으로 접은 하얀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채은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가 적혀 있는 종이였다. 그녀의 온갖 고민거리들이 그 안에 모여 있었다. ‘수학 성적이 안 올라, 근데 죽어도 하기 싫어요.’ 따위의 말을 시작으로 ‘사실은 과학도 싫어요. 저 저번 모의고사에서 9등급 받은 거 알아요?’ 같은 고해성사까지, 줄줄이 적어놓은 문장들이 빼곡했다. 그의 시선은 맨 밑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다른 글자들보다 유난히 크게 적은 문장이었다. 최종 목표.

‘허묵 선배랑 같은 학교 가서 CC 하기!’

빨간 볼펜으로 주위에 별표까지 친 문장이 그의 시각을 확 집중시켰다. 어쩐지 채은이 빨간 볼펜을 꺼내 별을 그리는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그녀의 귀엽고도 대담한 포부를 몇 번이고 곱씹은 허묵은 양 입꼬리를 보기 좋게 위로 끌어올렸다.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과외도 열심히 들어야 할 것 같고.

이윽고 필통에서 노란 계열의 형광펜을 꺼내 그 줄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는 종이를 곱게 반으로 접어 플래너에 다시 끼워 넣었다. 오늘 날짜가 적힌 플래너의 빈 공간에, 허묵이 짧은 문장을 작게 적었다.

‘오래 보자, 우리.’

살짝 열린 창문의 틈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미풍은 허묵의 머리칼과 코끝을 약하게 간지럽히고는 저만치로 사라졌다. 마치 채은과도 같았다. 갑자기 다가와 저를 건드리고 홀연히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는 제 진심이 실린 싱그러운 바람이 그녀의 마음까지 닿기를 바랐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