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그 해 봄

한 (@For_Floweryou_)

* 시점은 4 월, 봄입니다.

 

“ 하나, 집에 안 가? ”

“ 으음... 아직. 세나 먼저 가! ”

 

새로운 기획안은 이미 회의를 끝난지 오래. 이 시간 즈음이면 작성까지 마쳤을 게 분명하다. 다 마치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의 시간이니까. 다만 이제야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걸까, 급히 빼곡히 글자가 적힌 하얀 종이들을 한데 모아 탁탁, 소리를 내었다. 대략 이십 장은 되어 보이는 두께. 오늘 회의가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실감시켜주는 장 수였다.

 

하늘은 어느새 주황색과 노란색, 그 중간의 색을 띤 노을로 가득 찼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숫자 6을 가리키고 있었고, 학교는 모두가 빠져나간 듯 고요했다. 마치 이 학교에 둘만 남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 어색한 공기를 채우는 건 쓸데없이 규칙적인 시침 소리뿐이었다.

 

“오늘은 이미 충분히 고생했잖아?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가지.”

“아냐, 아냐! 정말 세나 먼저 가. 나 혼자서 마저 할 일이 있어서.”

 

 

혼자서, 라는 말에 살짝 강조를 둔 너를 보고선 한숨을 쉬었다. 왜 저렇게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는 건지 항상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츠의 회의가 늦게까지 이어지고 마지막에 둘만 남는 경우엔 항상 이랬다. 먼저 가라, 나는 나중에 가겠다. 이미 작성을 끝낸 건 아까 분명히 본 거 같은데 대체 어떤 게 아직도 남았다는 건지. 나랑 상의도 없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건가? 하다가도 초보 프로듀서라는 명찰을 달고 사는 이 아이를 생각해보면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만약 새로운 걸 기획했어도 나나 나루 군하고 같이 상의했겠지.

 

“그래, 그럼.”

“잘 가, 세나! 내일 보자!”

 

별일 없겠지, 하고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대충 손 한 번을 휘저어주고선 스튜디오에 문을 닫고선 복도를 걸었다.

여전히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 그리고 고요한 복도. 이 공기를 채우는 건 구두 소리와 가방과 옷이 마찰하는 소리. 그리고 심장 소리였다. 이건,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 살짝 짜증이 난 듯싶은 소리가 섞인 한숨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언제부터였을까, 3 월? 아니면, 작년 7 월? 더 되짚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됐다, 이런 걸 신경 써서 뭐 하겠어. 걔는 프로듀서고, 나는 아이돌인데. 어느 쪽이 되든 서로가 힘들 것이란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었지 마음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뿐. 그 ‘세나 이즈미’ 가 요즘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다는 걸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일까. 비웃을까, 아니면 안쓰러워할까. 어느 쪽이든 비극이지만.

세나 이즈미, 인기 유닛 나이츠의 임시 리더. 지금은 물론 잠시 물러나있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이츠의 핵심 인물이자 없어서는 안되는, 그만큼 명성 높은 인물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델 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으며 지금까지 그 일을 놓지 않고 있는 천생 연예인. 몇몇 후배들은 그를 우러러 보기도 하였고, 같은 학년의 아이돌 동료들도 그를 대단하게 여기곤 했다. 도도하고 시니컬한 왕자, 그의 팬들이 때때로 그에게 부르는 애칭이였다. 그만큼 그는 감정에 전혀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앞길만 보고 간다, 같은 이미지가 강했던 터인데-

 

그날, 한 여자아이가 그의 앞에 나타나고 난 후 그의 계절은 봄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

 

문을 나서 교문으로 나가려던 참, 멍하니 운동장을 보다 내일 체육 수업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아차, 체육복. 오늘 점심시간에 사물함에 넣어놓았다는 걸 가까스로 생각해 내었다. 답지 않게 이런 것도 깜빡하고... 진짜 요즘 정신이 이상해졌나. 진짜 정신 차려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학교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노을마저 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조금씩 군청색으로 덮혀지고 있었다. 해가 더 지기 전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그 덕분에 이 층 창문에 비치던 긴 머리 여자아이의 인영조차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저 찰나의 순간이었다.

 

삼 층, 계단을 올라서 바로 돌아서면 보이는 반. 아무도 없는 교실에는 오전과 달리 매우 적막했다. 살짝 열려있는 창문 덕분에 사이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커튼은 살살 휘날렸고 창문으로는 희미한 한 줄기 햇빛이 교실 중앙으로 비쳐오고 있었다. 반사된 햇빛에 눈을 쏘여 살짝 인상이 찡그려지기도 했지만, 그 햇빛도 점점 창문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선 서둘러 체육복을 찾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세게 닫은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민망하리만큼 크게 소리가 나버려서 그 소리는 복도를 통해 전해졌다. 그때까지 세나 이즈미는 별생각이 없었다. 혹여나 학교에 누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삼 층을 빠져나왔을 뿐.

 

이 층, 일 층. 하늘은 어느새 주황색과 노란색 대신 파란색에 물을 섞은 듯한 색으로 물들였다. 살짝 학교를 올려다보니 이 층에 있는 나이츠 스튜디오에는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다. 엇갈린 건가,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같이 갈 수도- 까지만 생각했다.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눈을 뜨면 깨어버릴 꿈이면 어떡할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꿈이라도 꾸면 좋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꿈을 꾸면 꿀 수록 그 허망한 꿈에 매달리게 된다. 혹시나 진짜로 그 꿈이 현실에서도 일어날까, 그리고 그 꿈이 계속해서 내게 지속되지는 않을까 하는. 뭐라고 했던가, 꿈과 현실은 언제나 반대로 이어진다고. 어쩌면 그날 그 아이를 만난 날도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 머릿속에서 이어진 것. 그리고 그 두 번째 만남도 역시나 꿈이었을지 모르는 일. 꿈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그저 너무 앞만 보고 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혼자만의 쉼터일 뿐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꿈을 헛된 망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 아이를 만난 덕분에 그때 나는 모든 걸 해낼 수 있었으니까. 또 지금 겨우 만났는데. 이것마저 꿈이면 너무 비극적이라.

 

학교는 고요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학교가 끝나 신나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던 일 층 신발장은 어느새 한 남자아이만이 남아있었다. 신발장이 끼익 하고 내는 소리, 단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가 얼마나 둔탁했는지 몇 초 가량 복도에 울려퍼질 정도였다. 실내화를 갈아 신으려 고개를 숙였을 때, 답지 않게 가방 지퍼를 닫지 않았는지 물병이 떨어져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오늘따라 왜 이러지. 짜증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화를 다 갈아 신은 다음에서야 물병을 주우러 일어날 수 있었다. 길이 살짝 경사가 나 있었던 건진 몰라도 어느새 저 반대편까지 굴러간 병을 주우려는 생각을 하니 한 번 더 짜증이 몰려오긴 했지만. 스무 걸음 정도 걷고 난 후에야 물병을 주울 수 있었다. 다시 가방에다가 집어넣고 이번에는 제대로 지퍼까지 잠긴 것을 보고 난 후에 교문으로 향하려고 하던 참.

 

♪♬~♩

 

어디선가 희미한 악기 소리, 아니. 분명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

 

음악 소리를 거슬러 따라가다 보니 아까 있던 본관과 다른 건물인 곳, 그리고 1층. 1층 복도에서 피아노 소리는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피아노를 칠 사람은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 학교에 남아 있던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외부인일 것이다. 나름대로 보안이 좋은 학교라고 믿었었는데 아니었나. 외부인에게 얼굴을 비춰야 한다는 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면서 모르는 척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엄청나게 신경 쓰이겠지.

 

들키지 않게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잘못 들어온 건 저 외부인일 텐데, 왜 내가 도둑처럼 살금살금 걷고 있는 건지 처지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그 헛웃음을 목으로 삼켰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예상했던 대로 소리가 나는 곳은 학교 내 음악실. 음악실은 아무나 가지 못하는 곳이 아니었나. 분명 평소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는 곳일 터였는데... 온갖 허구한 망상을 뒤로 한 채 마침내 음악실 앞 문에 다다랐다. 피아노 소리는 끊기지 않고 계속 들리고 있었고, 그 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연주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의, 단순히 화려한 것이 아닌 가슴을 울리고 머릿속에 박힐 듯한 연주. 어릴 적에도 피아노 연주회에 가끔 가본 적이 있었긴 했지만, 이런 연주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멍하니 연주를 듣다 보니 어느새 그 연주가 멈췄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열려던 문을 채 열지도 못한 채 손잡이에만 멀뚱히 손을 대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순간, 안쪽에서 끼익, 하고 피아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볍지만 둔탁한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론 세나 이즈미는 여전히 인지하지 못한 채로.

 

채 열리지 못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사람은-

 

“...... 세나?”

“ ...... 아?”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에 휜 머리띠, 어떤 꽃을 연상시키는 자안, 그리고 파란 조끼. 삼십 분 전도 아닌, 이십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같이 있었던 그 아이. 소라 하나였다.

 

“저기, 아니. 하나.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 그러는 세나야말로. 아까 간다고 하지 않았-”

"분명히 시간이면 집에 가는 거 아냐? 보니까 스튜디오에 불도 꺼져있어서 당연히 간 줄 알았는데.”

“...... 어?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들어와. 누가 오해할라.”

 

분명 다른 날, 다른 시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고 흘러 보냈을 말이 괜스레 귀에 박혔다. 누가 오해할라, 하고 말하는 네 말이 왠지 모르게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느낌이라서. 아니, 잠깐.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데. 분명 잘못한 건 쟤고 나는 그걸 잡으러 온 건데...

 

“왜 이 시간에 음악실에 있어.”

“그~게...”

“음악실은 또 어떻게 열었고?”

“그러니까...”

“죄라도 지었어?”

 

우물쭈물 한 자세, 어영부영 말끝을 흐리는 태도. 평소의 소라 하나와는 전혀 달랐다,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을 정도로. 평소 같았으면 답답하긴 커녕 너무 시원시원해서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얼떨결에 피아노 옆에 대충 펼쳐져 있던 갈색 책상 의자에 앉자마자 보이는 건 악보대에 깔끔하게 펼쳐져 있는 악보 몇 장, 그리고 피아노 위에 올려져 있는 검은색 악보 파일들.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의 가방, 핸드폰, 그리고 아까 정리해놓고 간 서류가 클립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채로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순서는 제대로 맞춰놨으려나, 하고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게 평소에 정리라곤 하나도 안 하고 다녔으니까.

 

“아하하, 하하...”

“왜 바보 같은 웃음만 짓고 있는 건데? 변명할 게 있으면 해보고, 아니면 선생님한테 말하고,”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게, 그으...”

“선생님들 몰래?”

“아니! 선생님들 몰래 어떻게 열쇠를 빼와. 다 허락받고 한 거야.”

“그래, 그럼... 피아노는 왜 치는 건데.”

“음...... 그냥?”

 

아무리 바보라도 그냥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갈 일은 없었다. 우선 실력이 실력인데 저게 그냥이면 세상 모든 천재들은 천재도 아니지. 필히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혹시 내가 불편하게 한 건가, 싶다가도 태도를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입 밖으로 내보내고 있지 않았지만, 저건 자의가 아니었다. 본능이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거나 혹은 그런 상태.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그냥, ... 피아노 잘 치길래 물어본 거니까.”

“피아노, 잘 치는 것 같아?”

“... 저 실력에 못 친다고 하는 건 기만인 것 같은데. 음악 전공이라도 했었어?”

 

넌지시 던진 질문이었다. 악기를 잘 하거나 하는 아이들에게는 큰 칭찬으로 들리는 말. 다만, 하나의 표정은 그런 아이들과 다르게 착잡해 보였다. 어딘가 그리워하는듯한 표정까지.

 

“세나.”

“응?”

“나, 예전에 뭐 했었는지 알아?”

 

평소의 하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른게 있었다면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까. 깊고 긴 자수정 색 눈빛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 순간 그 눈빛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항상 그랬다, 하나의 얼굴을 볼 때면. 다른 멤버들한테 물어봐도 오는 것은 뭔지 모르겠다는 의미의 침묵. 그래, 그럴 법도 하지. 저 눈을 바라보다가 보면 자연스레 대답이 나오곤 했다.

 

“피아노?”

“응, 정답~”

“... 하?”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아니, 정말로? 넌지시 던진 예의상 대답이었는데. 대답을 들은 이후 여러 생각이 오가기 시작했다. 첫째, 피아노는 왜 그만뒀는지. 둘째, 분명 2학년 때까지는 일반과에 있었다는 걸 아는데 왜 전공이라면서 음악과가 아닌지. 셋째...

 

“무슨 생각 해?

“... 하? 아니, 아무 생각도.”

“흐흥, 왜 내가 그만뒀는지 궁금하구나?”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능글거린 표정을 짓는 사람, 저건 내가 아는 소라 하나가 맞았다. 언제나 밝고, 화창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그 모습이 가장 눈부시고 나이 대에 어울리는 사람. 그 뒤에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으니까.

 

채 다시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물론, 다 말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중간중간에 말할 때마다 뜸을 들이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말하는 내용은 전부 진심이었다. 눈은 또렷했고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기억을 회상하려 눈을 감는 것까지. 분명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눈물을 쏟거나 울컥이라도 할 텐데,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는 한치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는 지금 후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나한테까지 느껴질 정도로.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원래는 음악과로 갈 생각이었으나, 친가 쪽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완전히 미련을 놓고 살았다고. 다만 2학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피아노가 다시 하고 싶어져서 무작정 치고는 있으나 예전 실력이 안 나오고 그게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라고... 저 정도 실력이 예전을 완벽히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면 대체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라는 걸까. 아마도 내가 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엄청나겠지.

 

다만, 나는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아이가... 어째서인지 멋져 보였다. 어째서였을까,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확실히 알고 그걸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래 보였다. 분명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아는 것과, 또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게다가 앞의 상황으로 봐서는 이미 한 번 끊어진 줄이 아니었던가. 지금 와서 발버둥 쳐봤자 하지 못할 확률이 높을 터인데. 나였으면, 하지 못했다.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한 번 놓은 것은 다시 붙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종종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불안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과연 내가 아이돌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게 맞았다. 다만 하나를 보자 왠지, 왠지 모르게 걱정이 덜어졌다. 스스로조차 영문을 모를 만큼 순식간이었지만 분명했다. 나는, 안심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단 앞만 보고 달리는 이 여자아이를 보자 너무 걱정만 하고 살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저 그 모습으로 위로가 되어버려서.

 

그 해 봄, 나는 그 꽃 같은 여자아이에게 눈이 부셨다.

 

...... 한 번 더 연정을 품게 되었다는 소리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