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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담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 주홍빛의 공기에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그이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조금 눅눅한 공기 속, 나토리 슈이치는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 잔뜩 쌓여있는 책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 그는 종종 오래된 창고에 앉아서는 지금처럼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도,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는 아득함도 마냥 좋기만 했다. 금세라도 무너질 듯한 불안한 세상과는 단절되어, 여태껏 자신이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배워갈수록 조금씩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목표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이 뻐근해지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그는 잠시 책을 덮어두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연약한 빛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아마도 평생 안고 가야 할 지워지지 않을 문양이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아다니는 요괴를 바라보았다. 이 미묘한 감정을 단순히 불안이라는 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데 끼익거리는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리며 무거운 빛살이 쏟아져 내렸다. 슈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잠시 숨을 멈췄다.

 

“쯧,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었던 거냐?”

 

아버지의 설교는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을 테니 구태여 설득시키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과 다른 세상을 보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슈이치는 저도 모르게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며 이어지는 훈계에 대한 성의 없는 대답을 내뱉었다. 한심한 녀석.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어렸을 때는 저런 태도에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곤 했었다. 전부, 요괴를 보는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으니까.

슈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지금도 어쩌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것이 더 편할 것만 같았다. 그는 창고에서 나오며 벗고 있던 안경을 꺼내 썼다. 도수 없는, 그저 유리에 불과할 뿐인 얇은 막 하나로 자신의 세상이 선명해지는 것이 좋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은 본디 이런 단순한 것 하나로 뚜렷해지는 흐릿하고 불완전한 곳이구나 싶었다. 모든 이들이 스스로의 세계를 불안하다 느끼지는 않을 것이랴. 나토리 슈이치는 묻어나오는 씁쓸함을 숨기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등을 보였던 것은 아버지의 쪽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었지만 무작정 집에서 나온 그는 별생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어느 공원에 도착했다. 아주 찬찬히 옅은 빛깔의 노을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선선한 바람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것에 스며든다. 짙은 가을의 공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멍하니 앉아있던 그의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간다. 긴 머리카락이 살랑임과 동시에 하늘거리는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슈이치는 상체를 숙여 그것을 주워들고서는 바삐 움직이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새겨져있는 세밀한 자수를 멍하니 매만지던 그는, 그 사람과의 거리가 꽤나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저기!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원, 적막만이 내려앉던 그곳에 슈이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 다정하지는 않은, 그저 급박함만을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아마 이것을 돌려주지 못한 뒤에 남을 찝찝함이 싫었던 것이랴. 다행히도 그 누군가는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왔다.

 

노을에 물든 사람, 나토리 슈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주홍빛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하늘 위로 흘러내리고 있던 색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반짝이는 것이 지금의 순간인지 아니면 제 앞에 서있는 이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슈이치가 하는 것이라고는 느린 호흡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는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먼저 말을 내뱉었다.

 

“아, 주워주신 건가요? 감사해요.”

 

온통 온한 색으로 뒤덮인 이에게서는, 어울리지 않는 시린 목소리가 났다. 어째서인지 입이 움직이지 않아 그저 고개만을 끄덕인 슈이치는 손수건을 건네었다. 가을을 담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 주홍빛의 공기에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이는 희미한 웃음을 내보였다. 아마도, 이 순간을 잊지는 않을 것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슈이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초조한 일이라도 있는 듯 생각에 잠긴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벼이 두들겼다. 공원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사이, 슈이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만난 그 사람이 같은 학교의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체 만 체 하고서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끝에 한 사람이 들어온다.

마토바 카게미야, 상냥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는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슈이치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수업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카게미야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 묻자 학생회장이라 유명하다는 말에 자신이 얼마나 학교생활에 무관심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아버릴 뿐이었으니, 이제 타인에게서 듣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녀와 더 가까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가까워지고 싶었다. 첫눈에 반했다거나 운명이란 걸 느꼈다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카게미야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슈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그가 이렇게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갑자기 죄송해요 선배.”

“아니, 괜찮아.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학교에서 마주친 후, 몇 번 말을 섞어본 적이 있었기에 둘 사이의 공기가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단둘이 얘기를 나누자고 할 만큼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미 일은 벌어졌고 고요한 뒤뜰에는 단둘만이 서있었다. 곧 다가올 계절의 차가운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슈이치는 잠시 숨을 삼키고 고개를 바로 하였다. 그것은 꽤나 용기를 필요로 한 일이었다. 카게미야의 붉은빛 눈동자 너머, 그녀의 뒤에 있는 한 요괴와 눈이 마주친다. 서늘함이 맴돌며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타인에게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았던 슈이치가 어떻게든 카게미야와의 거리를 좁히려 든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아마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오롯이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요괴 탓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타적인 마음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단순히 걱정을 넘어서 퇴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랴. 슈이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인지 모르게 카게미야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몇 번을 연습했던 말들이 새하앻게 지워진지 오래였다. 정적이 두 사람 사이로 가라앉는다. 꽤나 길게 느껴지는 것만 같은 그 시간 속에서, 지금의 진지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웃음소리가 울린다. 슈이치는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단정하게 묶은 반묶음 머리를 한 번 만지작거리고, 카게미야는 부드러이 웃어보였다.

 

“알아. 나하고 같이 있는 요괴가 신경 쓰인 거지?”

 

그녀의 말에 슈이치는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그녀가 자신처럼 요괴를 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카게미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상냥하기만 한 것도 나쁘지 않지. 퇴치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그래도 자신이 덤빌 상대는 제대로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나토리 슈이치 군.”

 

공기가 바뀐다. 하늘거리는 그림자를 딛고 선 카게미야는, 제 이름과 썩 어울리는 웃음을 내보였다. 그녀는 무언가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입술을 닫고 즐거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순간에 뒤집어진 분위기의 흐름을 겨우 따라간 슈이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제와 떠올려보면, 어디선가 본 둣한 불쾌한 붉은색이었다. 마토바. 그의 중얼거림은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잠시 비틀렸던 표정이 평상시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짙은 숨을 내뱉으며 제 앞에 서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엮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슈이치는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의 고등학교 생활이 분명 더 귀찮아질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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