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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이상하리만치 찬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여름과 가을의 사이라고는 해도 며칠간 여름 날씨가 이어졌으니, 오늘도 더울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날씨가 어떻게 됐나. 이런 간절기에는 춘추복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찬바람에도 별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여름 날씨에 대비해 하복을 입고 등교한 학생들이 퍽 괴로워 보였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들이었기에 별다른 신경은 쓰지 않은 채 카즈아키는 교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교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누군가 그의 등을 톡 두드렸다. 자신에게 이리 친근하게 대할 사람이 있었나, 잠깐 생각하고 등을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야였다. 친구의 한 살 위의 누나이자 오래전부터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3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학교의 입시를 치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주위 사람들은 명문 고등학교라 지원한 줄 알고 있겠지만. 그런 그였으나 여름방학이 끝나고 처음 보는 것도 같았다. 대입을 준비하고 있어서일까, 1학년 때보다 얼굴을 마주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여전히 다정하게 웃어주는 그를 보자니 자신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안녕, 카즈 군!”

“아, 아야 선배. 좋은 아침이에요.”

 

가볍게 묵례를 하자 아야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듯하고 작은 손의 온기를 느끼며 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동생 취급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졸업할 때까지도 이렇게 동생의 친구인 채로 끝나는 걸까.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야는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다시 한번 웃어주었다. 카즈 군, 키 컸구나? 하고 말하지만, 그를 연애 대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식을 잘 키운 어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야,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선배는 항상 그런 식이에요.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속내를 다 말해버릴 것만 같아서, 자리를 뜨려 했다. 그 전에 어서 가야 해. 그의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카즈아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어,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당번이라서요. 먼저 가 볼게요.”

“그래? 바쁜데 잡아서 미안해. 빨리 가야겠다.”

 

선배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속으로 생각하고 다시 한번 가볍게 묵례를 하고 가려던 순간, 아야가 하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날씨가 더울 줄 알았던 건가. 잠깐 생각하고 제 재킷을 벗어 그에게 둘러주었다. 선배, 오늘 날씨가 추워요. 이거라도 입고 계세요. 말하며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하면 방과 후, 한 번 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답지 않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교실로 향했다. 평소라면 거슬렸을 교실의 소음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왠지 오늘 수업은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방과 후를 너무 기대했던 탓일까, 한 교시 한 교시가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그래도 학업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던 터라 복습도 하며 꾸역꾸역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드디어 방과 후, 다른 이들은 하나둘 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떠났다. 카즈아키는 일부러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3학년 교실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대략 5분 정도 걸리니 그가 가방을 다 챙겼을 때쯤이면 그가 올 것이었다. 필통, 공책, 교과서. 짐을 챙기며 그는 자신의 가방에 담긴 것이 꽤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보다 가방을 빨리 챙긴 그는 아야가 올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반으로 찾아갈까? 아니다. 자칫하면 재킷을 빨리 돌려달라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3학년들의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그의 반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다른 3학년들이 자신에 대한 것을 속닥거리는 상상을 하곤 고개를 저었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자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니 다른 이들은 모두 집에 가고,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선배는 언제 올까, 작게 혼잣말했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책상을 두드렸다. 톡, 톡, 톡, 톡.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는 소리는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래, 마치 아야 선배같이.

 

아야 선배? 자신도 모르게 나온 이름에 놀라 눈썹을 크게 올렸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구나. 주책이라고 생각하며 오른손을 계속 놀렸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였다. 톡톡, 톡톡, 톡, 콩, 콩콩, 콩. 마치 제 손놀림에 맞추려는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설레는데. 카즈아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빨리 선배가 왔으면 좋겠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MP3를 꺼내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역시 이 밴드의 노래는 좋다니까. 그렇게 홀로 시간을 보내다 창문을 바라보니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선배, 조금 늦네…. 5분은 훌쩍 지나고, 몇십 분째 기다린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잊어버리고 그냥 집에 간 건가? 만약 그렇다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혹시 몰라 그에게 연락하려던 차, 발소리가 들려왔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사이 발소리는 멎었고, 조금 뒤에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고, 혼잣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카즈 군…, 있어? 아니 없으려나……. 화나서 집에 갔으면 어쩌지…. 그래도 교실 불이 켜져 있으니까. 그, 실례합니다….”

“…아야 선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조금 지친 듯 보이는 아야였다.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어주었다. 카즈 군. 그토록 듣고 싶었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카즈아키는 기다리느라 지쳤던 것을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서 아침에 빌려준 재킷을 돌려받고, 아까 미리 챙겨두었던 가방을 들었다. 어차피 저녁에는 그와 함께 공부해야 했으니, 하굣길을 같이 갈 수 있었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이렇게 된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서둘러 교실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길이 왠지 멀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선배…. 오늘은 꽤 늦게 끝나셨네요.”

“아……, 응.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진로 상담을 좀 하느라.”

“선배는 수험생이니까요. 어쩔 수 없죠.”

 

카즈아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절로 내년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대학에 진학해서 고작 고등학생인 자신 같은 것에는 눈길도 가지 않을 정도로 더 멋진 사람들이 많다면, 그래서 영영 멀어져 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물었다. 선배는 어느 대학에 가고 싶어요? 그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응? 아, 미안. 생각할 게 많아져서 그래. 아직 확실하게 정한 건 아니지만…,”

 

그가 조심스레 입에 담은 것은 도쿄 소재의 명문 대학이었다. 그 말에 카즈아키는 그렇군요, 하고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얼 하든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카즈아키는 생각했다. 그것이 분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열심히 공부해서 꽁무니를 쫓아가는 게 전부였다.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그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렸다. 평생 따라잡을 수 없는 걸까. 곁에 설 수 없는 걸까. 기회가 있다면 아직 같은 고등학생인 지금이었지만, 그는 수험생이었고, 자신 때문에 입시를 망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선배라면 할 수 있어요.’, ‘응원할게요.’ 따위의 형식적인 것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왠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 선배 같이 가요~!”

“넌 입으로 걷냐? …빨리 와.”

“역시 선배~! 최고임다!”

 

노란 머리의 남성이 뛰어와 포니테일의 여성의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둘이 입고 있는 옷의 등 부분에는 대학의 로고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조금 전 아야가 가고 싶다고 했던 대학이었다. 캠퍼스 커플인가봐. 좋겠다~. 아야가 부러운 듯 말했다. 그 말에 카즈아키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 역시 선배는 대학 내에서 커플이 되는 것이 좋은 걸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선배는…, 저런 거 동경하세요?”

“으음, 아무래도 그러려나? 예전부터 주위에서 많이 들어왔으니까.”

 

그런가요, 카즈아키가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는 방금 지나간 두 명에 자신을 대입하고 있는 걸까, 역시 연하인 나로는 안되는 거야. 그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들어와. 오늘은 좀 늦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자.“

"실례합니다."

 

아야의 집에 도착해서, 평소대로 방 한구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책상에는 그의 어머니가 준비해주신 차가 놓여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가 공부를 봐주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입시를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결론에 몇 번 도달했더라? 항상 같은 결론을 도출해냄에도 불구하고, 카즈아키는 그에 대한 마음을 도저히 접을 수가 없었다. 더 좋아하게 되면 좋아하게 되었지, 전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떨 때는 그가 너무 좋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배도 같은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순정 만화의 주인공 같은 생각이었지만 좋아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따라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역시 그가 대학에 진학한다고 생각하면, 그 뒤의 일을 생각해 버려서 우울해졌다. 그렇다고 마냥 지금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입시로 바빠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이렇게 그가 제게 공부를 가르쳐 줄 때뿐이니. 언제가 좋았느냐고 한다면 그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제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때였을까.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날 수 있었고, 그도 웃으며 환영해주었다. 고교 입시는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한 시기였다. 또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즈아키는 펜을 딸깍거리다 입술에 갖다 댔다.

 

“카즈 군?”

 

아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물어왔다. 그에 카즈아키는 숨을 헛들이키고 볼펜을 떨어뜨렸다. 집중하지 않았다는 죄책감과 그런 모습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작은 목소리로 죄송해요…, 하고 말하자 아야는 한층 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가왔다. 어디 아파?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의 모습에 카즈아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모습에 아야는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카즈아키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진짜 아무 데도 안 아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오늘은 집중이 잘 안 되나 봐요.”

“왜 그럴까. 아픈 게 아니라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각했어?”

“에, 네?”

 

갑작스럽게 들어온 아야의 말에 카즈아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얼빠진 소리를 낸 자신의 입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있지, 어떤 사람이야?”

“……그것보다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선배…?”

“하루 정도는 이런 얘기 해도 되지 않겠어? 매일 공부만 하면 힘들잖아. 카즈 군의 얘기를 듣고 싶은걸.”

 

아무래도 오늘 공부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티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표정을 보자니 털어놓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아무래도 본인 앞에서 전부 얘기하기는 부끄러웠다. 한참 고민하던 카즈아키가 그의 시선 속에서 입을 열었다. 들키지 않도록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해야 했다.

 

“그, 말하자면 부끄러운데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에요.”

 

한번 말을 시작하니 처음의 머뭇거림은 어디 가고, 여태 표현하지 못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람은요, 항상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저를 잘 챙겨주고 본인의 일처럼 걱정해줬어요. 자기 일은 완벽하게 해내면서도 주변에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웃는 얼굴이 정말 아름다워요. 그 사람이 웃으면 저도 기분이 좋고, 항상 보고 있고 싶고 이왕이면 제가 그 사람을 웃을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공부도 잘해서 분명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이에요. …저 같은 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요. 말하고 슬쩍 아야를 보자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들켰나?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깐 정적이 흐르고, 아야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카즈 군을 사랑에 빠지게 한 사람이 있구나. 고백은 해봤어?”

“……아뇨.”

 

카즈아키가 쓰게 웃었다. 왜냐면요….

 

“그 사람은,”

선배는,

 

“저를 동생으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아야가 조금 큰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바닥만 바라보던 카즈아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약간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카즈 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그 애도 카즈 군을 좋아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사랑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카즈 군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카즈 군을 좋아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아줘. 답지 않은 그의 행동에 카즈아키는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아, 하고 소리 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 나도 모르게 이입해버렸나 봐.”

“아니에요. 제가 우유부단한걸요.”

 

아무튼, 나는 고백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 백 퍼센트 그 애가 받아준다는 보장은 못 하지만…. 아야는 아까보다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카즈아키가 책상 아래로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같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함이 아닌, 무언가 굳게 다짐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고, 이번에는 카즈아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몇 년간 품어왔던 이 감정을, 과연 고백해도 좋은 건가. 그의 말대로 백 퍼센트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생각에는 오십 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말대로 고백하는 것이 좋을까? 확실히, 그렇게 거부당한다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받아주는 쪽이 좋을 텐데. 카즈아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에 선배가 그 사람이라면. 그……, 받아주실 것 같나요?”

“…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했는지 아야가 되물었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고민하는 듯 왼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고민은 해 줄 정도구나.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괜히 손가락만 꼼질거리며 바라보고 있자니, 실눈을 뜬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었다. 카즈 군, 긴장했구나? 놀리는 듯한 말투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나한테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했어?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고백할 것이 맞았지만, 카즈아키는 그것을 정정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눈만 데룩 굴리고 있으니 아야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면 받아줄 것 같은데?”

“어…, 정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즈 군, 요즘 멋있어졌는걸. 분명 그 사람도 받아줄 거야.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성격에 이런 장난을 칠 리는 없었다. 카즈아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은 채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려 다 식어가는 차를 괜히 홀짝였다.

 

“감사합니다….”

“에이, 뭘. 카즈 군이라면 언제든지 상담해도 좋아.”

 

결국, 딱히 공부의 성과는 내지 않은 채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좋았다. 자신에게도 일말의 희망은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도 바닥의 물건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굉장히 나무라긴 했지만 뭐 어떤가. 카즈아키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제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고백이라. 지금 선배에게 라인을 보낼까? 생각하고 휴대전화를 집어 든 순간 예전에 그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카즈 군, 중요한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만나서 말하는 게 좋아.’

 

그 말 덕분에 예전에 자신에게 고백했던 여자아이를 만나 잘 해결하기도 했었지. 그때는 고백이라는 것이 이렇게 긴장되고 두려운 것인지 몰랐다. 거절당해 속 시원해졌다고 말했던 그 아이의 말이 이해될 것도 같았다. 집어 든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자신의 특기인 글을 쓰기로 했다. 직접 만나서 말한 다음이 편지를 선배에게 주면. 그것도 직접 말하는 게 될까? 아무래도 라인으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기는 했다.

 

예전에 사둔 깔끔한 편지지를 꺼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쓸 날이 올 줄이야.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하나하나 신중해야 했다. 필통에서 가장 좋은 펜을 꺼내 잘 나오는지 확인해보았다. 응, 이 정도면 괜찮겠다. 초고를 쓰려 안 쓰는 공책도 꺼냈다. 아야 선배에게. 받는 이를 쓰고 한참 동안 펜은 멈추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많이 놀라셨죠? 사실 제가 얘기했던 좋아하는 사람은 선배였어요. 아니야, 종이를 구겼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쓸 수 있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많이 써볼걸.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다시 펜을 들고 공책에 써내려간다. 이것도 아니야. 좀 더…. 다시 종이를 구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길어질 것 같았다. 카즈아키는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사사야마 카즈아키. 됐다.”

 

편지지 세 장. 결국, 제 마음을 다 적어낸 카즈아키는 깔끔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연애편지에는 하트 모양 스티커를 붙여야 하나 싶었지만, 자신의 집에 그런 스티커는 없었다. 평범하게 동그란 스티커를 붙이고 나서야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학교에 가야 했다. 그는 간단하게 세수를 한 뒤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빨리 선배를 보고 싶어.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지만, 아야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은 일찍 가셨나 보다. 왠지 모를 실망감을 안은 채 교실에 도착했다. 방과 후에는 만날 수 있을까? 어제 상담을 했다고 했으니 오늘은 제시간에 집에 가시겠지. 오늘도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꺼냈다.

 

세상의 시간이 점점 느리게 흘러가나 싶을 정도로 어제보다도 긴 하루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챙겨둔 가방을 들고 나가거나 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떠났다. 카즈아키는 오늘도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내용물이었지만 오늘은 소중한 사람에게 전할 편지가 있었다. 괜히 구겨지지 않도록 정갈하게 정리한 가방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렇게 잠깐 기다리니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3학년들이 내려오는 소리였다. 카즈아키는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의 문을 잠그고 복도로 향했다.

 

많은 인파 속에 카즈아키는 익숙한 푸른 머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선배, 어디에 있어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다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저만치 멀리에 그토록 찾던 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놓치면 안 돼.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선배! 하고 외치자, 그는 드디어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이 되고 처음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안녕, 카즈 군. 오늘 처음 보네. 카즈아키는 주먹을 꼭 쥐고 소리치듯 말했다.

 

“선배! 그…, 할 말이 있어요. 혹시 안 바쁘시면 따라와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무슨 일이야?”

 

흔쾌히 수락하는 그를 보고 카즈아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바쁘시면 어쩌나 했어요. 그런 생각은 안 했지만. 일단 되는대로 말을 뱉었다. 그렇게 사람이 적은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어느 정도 사람이 드물어졌을 때, 그들은 멈춰섰다. 이쯤이면 괜찮겠죠? 주위를 살피는 그를 보고 아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거야. 카즈 군.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카즈아키는 괜히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선배랑 상담하면서…, 용기를 얻게 됐어요. 그, 고백, 해보려구요.”

“정말? 잘됐다~ 응원할게.”

 

그가 가방에 고이 보관해 둔 편지를 들고 드디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가장 큰 용기를 낼 때는 지금일 것만 같았다. 그는 편지를 양손으로 쥐고 내밀었다.

 

“아야 선배, 좋아해요! 예전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저랑 사귀어 주세요!”

“카즈 군…?”

“그, 선배가, 이-이런 건 직접 전하는 게 좋다고 하셔서, …그러니까, 그래도 역시, 마-막상 선배를 보면…, 말이 잘, 아-안 나올 것 같아서요. ……그, 그래서 편지를 썼어요…….”

 

심하게 더듬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바보, 그렇게 열심히 써 놓고는 결국 이런 식이지.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어제 놀림 받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야의 반응을 보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은 한참 편지를 들고 있다가, 작은 떨림과 함께 편지를 빼앗겼다. 그동안 아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정도로 반응이 없자, 카즈아키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선배…?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한 손으로 편지를 들고 서 있는 아야였다. 역시 싫었던 걸까, 뭐라도 변명하려 고개를 완전히 들자 그가 상상한 것과는 정반대의 아야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마 자신과 같은 색일 붉은 얼굴이었다. 편지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는…건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아,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선배…?”

“미안……, 그. 기뻐서.”

 

기쁘다고? 예상하지 못한 말에 카즈아키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내 고백을, 편지를 받고 선배가 기쁘다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다시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어제 말한 좋아하는 사람이란 게, 나였어? 아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는 또다시 말이 없었다. 카즈아키는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는 것처럼, 또 한 번 그에게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한 목소리였다.

 

“정말 좋아해요, 아야 선배.”

“…….”

 

답지 않게 찬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아야의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고, 그는 입술을 움직였다. 아마 그 역시 오랫동안 간직해왔을 그 말을. 카즈 군, 나…, 카즈아키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나고,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 걸 그랬어요. 그러게. 우린 지금까지 뭘 한 걸까. 살짝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작게 웃었다.

 

그는 언젠가 졸업해버릴 테였지만, 카즈아키는 다가올 겨울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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