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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7일 월요일. 날씨 맑음.

 

 

4교시가 끝난 후 점심시간. 매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고, 친한 애들끼리 도시락을 들고선 오늘은 어디서 먹을까, 하고 이야기하는 소리. 벌써 도시락을 꺼내 들곤 먹고 있는 아이. 그리고…… 방송실에서 송출되는 스피커에서 들리는 약간의 잡음. 오늘 라디오가 있던 날이던가? 마이크부터 켠 건가, 하고 생각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점심시간에 하는 방송부의 라디오는 교내에서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학교에서 라디오로 사연을 듣고 노래를 듣는다는 거에 의미가 있다나. 츠키시마 군은 별로 관심 없어? 치아루쨩, 방송부잖아! 1학년은 적응 기간을 가지고 나서, 2학기부터 돌아가면서 라디오 맡아서 한대. 스쳐 가며 야치가 이야기했던 말이 생각났다.

 

스가와라 치아루. 옆 반의 그 아이, 초등학교 때 같은 학교였던, 가끔 배구부를 보러 오는 그 아이. 대뜸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해도 딱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미워하기 힘든 아이.

방송부의 라디오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치아루가 맡아서 하는 날이라면, 그날 하루 정도는 헤드셋을 끼고서 다른 노래를 듣는 거 말고 라디오를 들을 의향도 있었다. 그냥, 치아루니까. 조금 조용하다 싶으면 옆에 오고, 시선 한참 밑에서 알짱대며 오늘 라디오 내가 하는 날이었는데, 안 들었어? 조금 서운한데! 라고 하는 얼굴이 그려져서.

 

 

─아, 아! 카라스노 고등학교 방송실에서 보내드리는 점심 교내 방송입니다. 2012년 8월 27일 월요일, 오늘의 라디오는 1학년 5반, 스가와라 치아루가 보내드립니다!

 

 

교실에서 야마구치와 같이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들려오는 라디오 속 목소리는 치아루였다. 오늘 라디오 하는 방송부원이 치아루던가. 되짚어보면 평소보다 오늘 하루는 눈앞에 치아루가 보이는 빈도가 낮았다, 싶은 느낌이 들어서. 혹시 이 준비 때문에 바빴던 건가,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라 적당히 시끄러운 반 분위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리고 오늘 라디오, 치아루구나. 저렇게 들으니까 목소리 새롭네. 그치, 츳키? 하고 한마디 덧붙이는 야마구치의 목소리까지.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요소들이 모여 있었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인데요, 지난 주말은, 또 오늘 하루의 반은 잘 보내셨나요? 이제 곧 9월이라곤 하지만, 오늘의 햇볕이 뜨거운 만큼 더 덥고, 힘들게 느껴지는 월요일 같아요. 오늘도 언제나처럼, 받은 사연 중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며 잠깐 이야기한 후, 노래 한 곡 들려드리며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럼, 첫 사연으로 넘어갈까요?

 

 

라디오라서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치아루가 괜히 들뜬 게, 또 그런 표정을 하는 게 눈앞에 아른거렸다. ……평소에도 맨날 들떠 있던 거 어디 안 가네. 어,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혼잣말에 재차 묻는 야마구치에게 대강 대답해 주고선 왼쪽 팔로 턱을 괴고선 밥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첫 사연은 3학년 3반의 학생이 보내 주셨어요. ‘저는 평소 학교에 올 때 들고 다니는 짐이 많아,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땐 매점에서 빵을 사 먹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학교의 매점 빵은 인기가 많아 점심시간에 얼른 뛰어가 줄을 서 봐도 제가 먹을 빵을 사기가 힘이 듭니다. 사연을 쓰는 오늘도 점심을 굶게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도시락 없이도 배를 쉽게 채울 수 있을까요?’라는 사연입니다.

 

 

처음엔 들떴지만 금방 차분해지면서 듣기 좋은 톤으로 라디오를 하는 치아루에 표정을 풀고선 라디오에 집중했다. 카라스노에 입학하고서 라디오를 제대로 들어보는 건 처음이라, 저런 바보 같고 의미 없는 사연도 들어오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보통 저런 걸 라디오 사연까지 적어서 보내나? 집에 있는 부모님이며 형–아키테루-이며, 배구부 레귤러 부원이 도시락 하나로 되겠냐며 두 개나 밀어 넣는 탓에 음식이 차고 넘치는데. 별로 공감은 안 되네, 하고 말았다.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한다는 건 조금 아쉽네요. 빵보다는 든든하게 배를 채우는 편이 학교생활에도 조금 도움이 될 텐데 말이에요. 사실 저도, 밥을 먹을 점심시간에 라디오를 해야 해서 오늘 도시락을 안 챙겨 왔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공복인데, 굉장히 배가 고파요. 이 상태로 오후까지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루라면 버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런 생활이 자주 반복된다면 꽤 힘들겠는 걸요. 매점 담당 아주머니께서 빵 종류나 양을 조금 늘려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 라디오, 매점 근처에도 송출이 되고 있는데, 혹시 듣고 계실까요? 헤헤.

 

 

밥을 못 먹고 라디오를 하고 있다는 게 꽤 의외였다. 자신은 밥을 챙겨 먹는 거에 큰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배가 고픈 상황에서도 뭔가 열심히 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간단하게 뭐라도 챙겨 먹었으면 나았을 텐데. 왜 신경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친한 애가 밥을 못 챙겨 먹었다는 걸 들은 것뿐이었는데. 그러고선 가방 안에 있는, 원래는 남겨서 집에 그대로 들고 갈 예정이었던, 또 다른 하나의 도시락을 생각했다. 남는 도시락이면, 하나는 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번 사연은 2학년 4반의 학생이 보내 주신 사연입니다. ‘저는 같은 반에 좋아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 아이 앞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시간을 돌리고 싶어요. 그 아이가 저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고민도 돼요. 어떡하면 이런 기억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끄러운 일이 뭐였는지는 비밀인가 봐요. 앗, 특정된다면 사람도 특정하기 쉬우니, 역시 비밀일 수밖에 없나? 으음…… 뭔가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해도, 상대 쪽에선 크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구요! 어떤 일이든 평소처럼 대한다면~ 상대방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더라도 어라, 내가 잘못 봤나? 할 수 있을 정도로 평소처럼, 또 당당해지는 거죠! 분명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츳키, 몸 상태 별로야? 넋 놓고 있길래. 아, 내가 넋 놓고 있었나. 생각보다 아까 그 도시락 생각에 잠겨 있었나, 싶었다. 원래 점심시간 라디오는 얼마나 하더라? 음, 점심시간이 다 가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까? 잠깐 나갔다 올게. 기다리지 말고 마저 먹어, 미안. 그렇게 말하고선 먹던 도시락이랑 다른 도시락까지 챙겨서 방송실로 향했다. 도착할 때까지 안 끝나면 기다릴 생각이었다.

 

 

─다음은 2학년 3반의 학생이 보내 주신 사연이에요. ‘오늘 아침에 침대에서 굴러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잘 때 몸부림이 심한 편인데, 이틀에 한 번꼴로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요. 임시방편으로 베개로 테두리를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쓸모없었습니다. 매번 일어나면 새로운 혹이 생겨 있는 걸 어쩌면 좋을까요?’라는 사연이네요. 으음~ 저는 잠버릇이 없는 편이라, 이런 고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임시방편을 만들어도 뭔가 잘 안된, 그런 상황이네요. 그렇게 되어 버리면 뭘 해도 잘 안 되려나! 헤헤. 침대에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떨어졌을 때 아프지 않기 위해! 바닥에 폭신한 이불을 깔아놓는 건 어떨까요? 떨어진 상태에서도 그냥 잘 수 있을 거고, 폭신할수록 혹이 안 생길 것 같으니까요. 혹시라도 집에 그러한 용도로 쓸 남는 이불이 없다면…… 침대 말고 바닥에서 자는 것도 한 방법일지 몰라요.

 

 

항상 헤드셋을 끼고 있느라 몰랐는데, 라디오는 복도에도 송출하는 것 같았다. 방송실로 가는 복도를 걸으며 들었다. 라디오를 하는 게 재밌는 건지, 억지로 끌어 내린 텐션이 다시 올라가는 게 들렸다. 치아루 성격이면 라디오를 하는 것도 잘 맞을 것 같다고 스쳐 지나가듯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아서.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잘하네.

 

점심시간의 복도는 라디오를 들을 만큼 조용하지도 않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시끄러운 편이어서. 라디오에 집중하려 해도 잘 되질 않아서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 소란 속에서 라디오를 듣는 애들은 어떻게 듣는 건지.

 

 

─이번 사연은 1학년 4반의 학생이 보내 주셨어요. ‘저희 반에는 인기 많은 아이가 있습니다.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무심코 그 아이의 얘기로 흘러가 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최근 들어 그 아이와 약간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으면, 마음을 접는 게 나을까요?’ 두근거리는 사연이네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굉장히 두근거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상대가 누구든 말이죠! 마음을 굳이 접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마음은, 접는다고 마음먹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더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약간 아이 같은 소리기도 하지만, 달님께 소원을 빌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쩌면 더 좋아질지도 모르고, 달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또, 저는 달님을 좋아하기도 해서요! 히히. 아무튼 기분이 좋아지고 상황도 더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답니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면 방송실이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ON AIR’ 표시의 등과, 그 등에 불이 들어온 게 보였다. 아, 방송실은 외부인 출입 금지던가. 멈칫한 상태로 있는데, 사연에 말을 덧붙이던 치아루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달님(つきさま). 츠키시마 케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발음과 비슷한 말에 달님이 좋다는 게 꼭 자신한테 하는 말 같았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츳키, 하고 불리는 탓에 달에 의식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

 

 

─다음 사연은 오늘의 마지막 사연이네요. 2학년 1반의 학생이 보내 주신 사연이에요.

 

 

근처 복도 벽에서 기대어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마지막 사연이라는 말에 얼마 안 남았다 싶어 꼈던 팔짱을 풀고선 라디오에 다시 집중했다. 저렇게 계속 종알거리면 목도 안 아픈가.

 

 

─‘저는 어쩌다 등하굣길에 친해진 선배가 있습니다. 그 선배랑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사실 그 선배는 약간 무서워 보이거든요. 얼굴이 무섭게 생겼다기보다는…… 풍기는 분위기나, 전체적인 그런 게요. 그런데 그 선배가 요즘 이상하게 저한테 잘해 줍니다. 어제는 하굣길에 가방을 들어 주기도 했어요. 저한테 뭔가 피할 수 없는 부탁을 하게 할 생각인 걸까요? 점점 걱정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헉, 저도 약간 걱정이 되긴 하는데요. 저를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일수록 무언가 부탁을 하면 거절하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호, 혹시라도 신변의 문제가 생긴다면……! 꼭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거로 합, 합시다! 부디 익명의 사연자님이 아무 일도 없이, 아니, 좋은 일이라면 있는 쪽이길! 저도 열심히 빌어볼게요.

 

 

사연을 보낸 사람에게 엄청나게 몰입하는 게 어이없어서 살짝 웃었다. 바보 같네. 뭘 그리 당황하는 거야. 딱 봐도 그 선배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거잖아? 말도 빨라지고 더듬는 게 웃겼다. 시계를 봤더니 점심시간이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빠듯하긴 했지만, 끝나고 나서 밥을 못 먹을 정도의 시간은 아닌, 딱 그 정도. 점심은 어디서 먹는 게 나은 건지. 평소엔 반에서 먹는 게 열 중의 열인 일이지만, 둘이서 반에 들어가서 먹는 건 별로 내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주목받을 거니까. 어, 다시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이제 오늘의 점심 라디오는 슬슬 끝낼 시간이에요. 오늘은 요루시카의 ‘쪽빛 제곱’을 들려 드리면서, 라디오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다음 라디오는 금주 수요일 점심시간이에요. 그럼, 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스가와라 치아루였어요!

 

 

노래는 아직 안 끝났는데 방송실 문이 열렸다. 잠깐 나와 쉴 생각이었다나, 문을 열고 나오는 치아루가 있었다. 치아루.

 

“엑, 케이가 왜 여기 있어?! …… 아! 혹시 케이, 이거 나 점심 안 먹어서 주려구 도시락 들고 온 거야? 히히, 라디오 들었어? 나 잘했어? 만약 안 들었으면 내 텔레파시가 전해졌다거나!”

 

딱히 대답할 말을 고르기도 전에 알아서 다 능청 떠는 치아루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 이상한 소리야, 그런 거 아니니까. 에, 진짜로?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은 해도 사실은 치아루가 이야기하는 거에 틀린 말은 없어서, 따로 거듭 정정하진 않았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예쁘게 웃는지.

 

“방송실에서 같이 먹을래? 부스 안은 절대 안 되지만, 그냥 대기실이면 환기만 잘하면 돼!”

 

케이는 왜 도시락이 두 개야? 헉, 혹시 타다시나 소라링 거 뺏어온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바보야.

왜애,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그렇게 방송실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단둘이라는 분위기도, 오늘 치아루가 한 말도, 그 목소리도. 치아루가 보여 준 그 웃는 얼굴도.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신경이 쓰여서. 아마 오늘 하루는, 오랫동안 기억할 기억 속의 늦여름의 하루.

 

 

연인이 되고 나서야 되돌아보는 그 날은, 그리고 그날의 우리는, 그 감정의 시작은.

이미 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길잡이였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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