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햇볕이 하즈키의 머리 위로 살며시 내려앉는다.

맑은 새소리가 들리고, 아침 일찍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분주했다. 하즈키는 손에 들린 사첼백을 고쳐 들었다. 꽤 무게가 나가는 가방을 손으로 들고 다니자니 슬슬 지쳐, 2학년이 되고 나서는 다른 애들처럼 스쿨백으로 바꿀까, 하고 하즈키는 생각한다. 나름 정 들었었는데. 가방을 든 손을 흘긋 바라보며 살짝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평소보다 일찍 나온 탓인지, 평소라면 학생들이 가득했을 통학로가 한적했다. 통학로의 가장자리나 정문 가까이에는 각 반의 당번이나 선도부가 먼저 등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좁은 골목이 하즈키의 작은 평화로움을 자아냈다. 졸업을 앞둔 3월, 하즈키는 피어나기 시작하는 벚나무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다가오는 봄을 만끽한다.

자연의 소리만이 들리는 통학로에 하즈키는 너무 일찍 나왔나, 하고 속으로 중얼인다. 바람이 불고, 벚꽃잎이 떨어지고,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갈 때 하즈키는 모퉁이를 돌아 골목을 빠져나온다.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이었다. 확실히 넓어진 통학로에는 드문드문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대부분 시끄러운 통학로가 싫어 일부러 일찍 나온 학생들이나 평소에도 이 시간에 나오는 학생들인 것 같았다. 하즈키는 통학로 오른쪽 가장자리에 붙어 담장의 그림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평소와 같은 미미한 웃음을 입에 머금은 채, 하즈키는 두 눈을 느리게 끔뻑인다.

“하즈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시며 동시에 말한 듯, 하즈키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숨결이 잔뜩 묻어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평소 좋아하는 목소리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하즈키를 부른다. 동시에 어깨에 손을 올리는 익숙한 손길에, 하즈키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웃는다.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 이미 알아차린 상대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가득 차 뻐근한 가슴에 한껏 숨을 들이쉬며 하즈키는 응, 하고 금방 대답한다. 눈이 마주치면 하즈키는 볼을 느슨하게 하여 상냥한 웃음을 짓는다. 시선이 중간에서 맞물리고, 상냥한 웃음을 짓는 하즈키에게 그는 뚱한 표정을 짓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보답한다. 조금 멀리서 뛰어왔는지 상기된 볼이 사랑스러웠다. 시바사키 아이조였다.

“…좋은 아침!” 두 눈을 끔뻑이다 내뱉은 말은 단순한 아침 인사였다. 하즈키는 혹시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는, 시바사키 아이조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아이조 군, 원래도 이 시간에 등교했던가?” 고개를 기울이며 하즈키가 묻는다.

“아아.”

아이조는 조용히 운을 뗀다. 어깨에 걸친 스쿨백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리다, 살짝 고개를 돌려 하즈키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오늘은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서. 조금 더 늦게 등교하면 애들한테 둘러싸이니까. 그게 귀찮기도 하고… 뭐.”

“아, 왠지 알 것 같아. 매일매일 애들한테 둘러싸이는 건 나라도 피곤할 것 같단 말이야…. 아이조 군이 다른 애들이랑 떠들고 있을 때도 계속 보고 있었지, 몇몇 애들.”

“뭐, 그렇지. 매 쉬는 시간마다 상대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이지, 아침에도 점심시간에도 하교할 때도 꺄꺄 소리를 지르니 말이야…….”

아이조가 속 깊숙이에서 꺼낸 듯한 한숨을 내뱉는다. 단둘이 나란히 걷고 있는데도 그 상황이 떠오르는 건지, 벌써부터 지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기 초에 1년 동안 잘 부탁한다는 말, 후회하고 있지!” 하즈키는 아이조 쪽으로 상체를 돌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당황한 듯 끙하고 표정을 짓는 아이조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보다 옅은 한숨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아이조는 가만히 있는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하즈키는 “후회하고 있구나!” 하고 검지로 아이조를 가리키며 장난을 친다. 아니야. 하즈키의 잔망스러운 웃음 못지않을 정도로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하며, 하즈키의 머리를 손으로 덮는다.

갑자기 덮어진 손에 하즈키는 그대로 어깨를 굳힌 채 눈동자만을 굴려 아이조를 바라본다. 꽤나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하즈키를 조용히 되받아치고는, 하즈키의 머리를 쓰다듬듯 아이조의 손이 천천히 쓸어내려가, 손을 거둔다. 다시 떨어진 빈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아무리 프로라도 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즈키는 괜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기울인다.

“이른 아침이라는 건, 정말 좋네.”

“……뜬금없어.”

“뭐 어때? 좋으면 된 거지.”

하즈키는 이를 보이며 상큼한 웃음을 짓는다. “같이 등교도 할 수 있고.”

“………….”

하즈키의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인지, 아이조는 입술을 비죽 내민 채 고개를 기울인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그런가. 하고 중얼인다. 그런 아이조의 모습에 하즈키는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린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네. 혀끝에 맴도는 말을 다시 되 삼킨 채, 학생들이 몰리기 전에 교실에 들어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교사를 향했다.

 

“어라.”

신교사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기 위해 신발장을 열었을 때였다. 하즈키의 실내화 위에 가지런히 놓인 편지봉투에, 실내화를 꺼내기도 전에 편지만 꺼내 손에 들었다. 옆에서 신발을 갈아신던 아이조가 “뭐야?”하고 관심을 보인다. 하즈키는 아무 생각 없이 아이조와 편지를 번갈아 보며, 글쎄, 하고 나지막이 대답한다. 나중에 읽을까, 하고 작게 중얼이며 사첼백의 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는다. 신발장에 놓여있는 실내화를 꺼내 갈아신고, 통학용 로퍼를 신발장에 넣는다.

“러브레터인 거 아니야?”

빤 바라보고 있던 아이조가 조용히 묻는다.

“엣.”

편지라는 사실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하즈키가, 당황한 듯이 목소리를 낸다. 양팔로 가방을 받치고는 곰곰이 생각한다. 아이조는 그런 하즈키를 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고민할 게 뭐가 있다고. 여전히 스쿨백을 어깨에 걸친 채 빈손으로 하즈키의 등을 누른다. 들어가자, 곧 애들 오겠어. 한 발짝 앞서간 탓에 아이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즈키는 그저 아, 응, 하고 그의 뒤를 재빨리 따라갔다. 아이조의 뒷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야 하나── 하즈키는 찬찬히 움직이는 아이조의 짧게 묶인 머리카락을 눈을 좇았다.

설마 질투인가?

어떻게 생각해도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갑자기 퉁명스러워진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갑자기 러브레터 아니냐고 물어보고는 그런가, 하고 생각하니 뚱한 얼굴로 얼굴도 안 보이고. 이게 질투가 아니면 뭔가! 턱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하즈키의 입가에 느물느물 웃음기가 올라온다. 검지로 립밤을 발라 촉촉한 입술을 조금씩 누르고 있으면, 먼저 반에 도착한 아이조가 반의 앞문을 연다.

 

“첫 번째네!”

 

문을 연 아이조의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반 안을 살펴보면서, 하즈키는 좋은 듯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반에 처음 도착한 적이 언제였더라. 하즈키는 그런 잡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제 자리로 간다. 책상 위에 사첼백을 올려놓고 가방을 열면, 옆자리인 아이조가 가방을 정리하기도 전에 의자를 끌어내 털썩 앉는다. 하즈키를 등진 채. 아마 엄청난 표정 짓고 있겠지. 하즈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표정. 하즈키는 조용히 생각하며, 쿡쿡 웃는다.

 

아까 전 사첼백 틈으로 집어넣었던 편지를 조용히 꺼내, 일부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아이조가 반응했는지, 몸을 틀어 이번에는 하즈키 쪽을 바라본다. 책상 위에 올려둔 제 가방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즈키에게로 상체를 숙여 꽤 진지한 얼굴로 하즈키에게 말한다.

 

“그거, 진짜 러브레터야?”

 

역시 신경 쓰고 있었구나. 하즈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아직 읽어보지 않아, 하즈키는 편지지를 왼손에 들고 “글쎄다.” 하고 고개를 기울인다. 러브레터로 추정 중인 편지를 책상에 조심스럽게 올려두고는 열어두었던 가방을 정리한다. 노트를 꺼내 서랍에 넣어두고, 가방을 닫아 옆 고리에 건다. 그제야 의자를 끌어내 자리에 앉은 하즈키가 다시금 편지지를 두 손에 든다.

 

“누가 이런 걸 보낸 거지?”

“……알 게 뭐야.”

 

뚱한 반응에 하즈키가 아하핫, 하고 웃음소리를 흘린다.

 

“신경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 질투라든가, 질투라든가!”

“뭐라는 거야!”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듯, 아이조는 책상에 손을 올리며 조금 큰 소리로 말한다. 그 반응에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고, 하즈키는 계속해서 아이조를 놀리듯 웃음 짓는다. 질투하고 있으면서! 하고 편지지를 입가로 가져다 댄다. 이 편지를 어떻게 할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하즈키는 나지막이 말한다. 그런 하즈키의 물음에 아이조는 고개를 돌려 턱을 괴고는 알까보냐, 하고, 대충 대답한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하나둘 반으로 들어오면 하즈키와 아이조는 자연스레 서로 모르는 척을 한다. 하즈키는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고, 아이조는 자리에 앉아 의자에 몸을 기울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반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반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나면 아이조에게로 다가간다. 오늘은 일찍 왔네! 유지로 군이랑은 같이 안 왔어? 오늘 아이조 군이 당번이던가. 따위의 이야기들에 아이조는 아이돌다운 웃음을 지으며 반긴다. 눈이 일찍 떠졌는데 할 것도 없으니까 그냥 왔어, 그 녀석은 아직도 자는 거 아니야? 같은, 아이조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말들이 겉만 예쁘게 포장한 무미건조한 말로 되돌아간다. 누구 한 명이 작은 농담을 던지면, 아이조는 그저 하하, 하고 소리 내 웃는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소리들을 들으며 하즈키는 창밖을 바라본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아는 얼굴이 있다면 손을 흔들어 마주 인사한다. 세토구치 히나나 타카미자와 아리사에게도 크게 팔을 흔들어 보인다.

 

HR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 자리로 돌아가려고 고개를 돌리면, 하즈키의 자리는 이미 그 옆자리인 아이조의 주변에 싸인 아이들로 인해 들어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즈키의 책상과 아이조의 책상 사이에 서 있는 여러 아이들이 하즈키의 책상을 조금씩 옆으로 밀고 있었다. 하즈키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잠깐만, 이라고 말하며 책상을 원위치로 돌리고는 자리에 앉는다. 아이조 책상의 앞자리나 옆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여자애들만 있었다면 한 톤 더 내려갔을 목소리가, 아이조의 앞에서는 유독 하이톤의 목소리가 되어 이야기를 나눈다.

유지로나 히요리가 반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한층 더 시끄러워진다.

 

일부러 반문 앞에서 조금 뜸을 들이고 유지로보다 더 나중에 들어오는 히요리를 보면서 하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히요리에게로 다가간다. 아, 유지로 군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소리를 뒤로 한 채, 유지로는 조금 졸린 얼굴로 “좋은 아침” 하고 대답한 뒤 자리로 돌아간다. 하즈키와 히요리가 발걸음을 옮긴 건 그 나중이었다.

 

오늘도 시끄럽네. 그러게. 하즈키와 히요리도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며 히요리의 자리로 들어간다. 생각해보면 히요리 쨩이 제일 고생이 많아. 주변의 목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게 말하는 하즈키에 히요리는 에헤헤, 하고 옅은 웃음을 짓는다.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이야기를 하지만,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어 히요리는 의자를 끌고 그나마 사람이 덜한 하즈키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즈키는 아이조가 하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하즈키는 소란스러운 옆자리를 무시한 채 히요리와 마주앉아 종이 치기 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나, 러브레터 받은 것 같아!”

 

히요리에게 자랑하듯 예쁘게 포장된 편지봉투를 척하고 보여주면 히요리는 눈을 빛내며 우와! 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히요리는 하즈키가 건네는 편지를 잡고는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름은 어디에도 안 적혀있는데……. 내용은 읽었어?”

 

자기 일이라도 되는 마냥 진지한 얼굴로 히요리는 하즈키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아, 그게.” 하즈키는 잠시 뜸을 들인다. 응, 응! 하고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히요리를 잠시 뒤로한 채, 눈동자만을 굴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이조를 흘긋 바라본다. 그렇다고 해도 바로 앞에서 아이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사실 아직 안 읽었어. 나, 이런 거에는 관심 없고…….” 하즈키는 그렇게 말하며 옅은 웃음을 흘린다. 히요리가 에── 하고 아쉬운 듯이 말한다.

“그래도, 하즈키 쨩도 그 팔찌 했지 않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반드시 이어진다는 그 팔찌.”

“아.” 하즈키가 순간 어깨를 경직시킨다. “아니야! 그건…….”

“설마 벌써 이어진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랑!”

팔찌를 사서 찼을 때는 분명 2학기 중순이었지. 히요리가 신난 듯 이야기 하면 하즈키는 아니야! 하면서 부정한다. 그 팔찌로 인해 이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이조랑 이어졌으니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인가. 허공에 알 수 없는 도형을 그리며 시선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아무리 히요리라도. 하즈키는 어어……. 하면서 망설인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이제는 관심 없어졌고! 누구인지도 모르고!”

저보다 더 신나는 얼굴을 하며 편지를 갖고 있던 히요리에게서 편지를 빼 온다. 정말 관심도 없는걸. 하즈키는 힘 빠진 목소리로 조용히 말한다. 애초에 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하즈키가 어떻게 할지도 모른 채 질투하는 아이조의 반응이 재밌었을 뿐. 놀려먹은 건 사과할까, 하다 그냥 조용히 있는다.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하즈키의 귀에서 멀어져간다. 책상에 팔을 올린 채 쭉 뻗어 편지를 가만 바라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러브레터가 아니더라도, 보통 편지는 신발장에 넣어놓지 않는다. 평범한 편지는 아니라는 소리 아닌가. 정말 러브레터라면 미안하지만, 하고 하즈키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서랍에 넣어버린다. 아이들 틈으로 하즈키를 흘긋 바라보고 있던 아이조는 하즈키의 속도 모르고 정말 답할지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하즈키는 아이조에게 보이지 않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느릿하게 웃는다. 왜 웃냐는 히요리의 말에, 하즈키는 그저 그냥! 하고 생기 있는 목소리로 답한다.

“그나저나 오늘도 여전히 소란스럽지.”

“그러게.” 히요리는 고개를 돌려 하즈키의 옆자리를 바라본다.

“여기는 덜한 편이지만, 히요리 쨩은 아이조 군이랑 유지로 군 사이에 껴있고.”

그 말에 히요리가 옅게 웃는다. 사실은 저도 떨어지길 바랐는데, 1년 내내 앞뒤 양옆으로 붙을 줄은 몰랐다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나쁜 건 없지만, 가끔 모르게 아는 척을 할 때마다 식겁하고는 한다고. 그렇게 말하며 하즈키의 책상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는 히요리를 보고 아, 나도 알 것 같아! 하고는 하즈키가 맞장구를 친다.

“다른 애들 앞에서 이름으로 불러버릴 것 같고!”

하즈키가 말하자 히요리가 이어 말한다. “나도 모르게 사무실 얘기를 꺼낼 것 같고!”

그렇지─ 힘들지── 따위의 말들을 나누며 하즈키와 히요리는 같이 웃는다. 유명 아이돌 LIP×LIP의 매니저 견습이라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니까,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일에 관한 이야기도 학교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고, 계속해서 서로 모르는 척했던 사이니만큼 둘이서 평범한 이야기를 나눠서도 안 됐다.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몇십 개의 시선들을 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둘이나 셋, 또는 넷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아이조나 유지로를 찾는 아이들이 나타나면 그대로 모르는 척 자리를 떠버려야 한다거나, 같이 있던 게 아니라고 극구부정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곤란한 일들이 많았다. 이사나 전학 예정이 없으니 아마 3학년까지도 계속 이렇게 지내야겠지. 히요리도 하즈키도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일 년 내내 소란스러웠던 반 사이에서, 히요리와 하즈키는 주변 소리에 묻힐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여러 화제를 꺼내 이야기를 하다 보면 화제는 다시 러브레터로 돌아와 있었다. 하즈키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있었으나, 히요리가 “그나저나─” 하면서 다시 러브레터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리라.

우리 반 애인가? 히요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턱으로 가져다 댔다. 옆 반 애일 수도 있어. 하즈키가 그렇게 이야기하며 같이 고민에 빠진다. 사실 대답할 마음도, 읽을 마음도 없지만, 이야기의 화제가 된 이상 생각은 해봐야 했다. 누구인지는 궁금한데, 하고, 하즈키는 그 말을 무심코 입 밖으로 흘린다. 하즈키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아이들의 중심에서 여유로운 표정이나 지으며 여전히 대화하고 있었다.

역시 프로네, 이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

하즈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딱히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아까 전까지 러브레터 때문에 질투나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아이들이랑 대화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다시금 히요리랑 대화를 나누다, 평소 자주 지내는 여자애들이 옆으로 몰려오면 또 그들과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놀고 있으면, HR 시간이 시작되는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반에 흩어져 있던 모든 아이가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간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반에, 하즈키는 아이조를 바라본다.

상냥하게 내려앉은 햇빛에 먼지가 공중에서 춤을 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느긋하고 무거운 구두 소리가 들리는 것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아이조가 하즈키를 바라본다.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조금 움직이고 눈동자만을 굴려 시선을 맞춘 것이었지만. 왜何. 하즈키만 보면 뚱해지는 평소와 여전한 얼굴로, 아이조는 입 모양으로 작게 말한다. 한쪽 뺨이 붉어졌다거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 하즈키는 어깨를 털며 쿡쿡 웃는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아니야何でも無いよ。 하고, 작게 대답한다.

“아── 여러분, 곧 졸업이네요─.”

천천히 운을 떼는 아케치의 목소리에, 하즈키는 고개를 돌린다. 러브레터에 관한 것은 점심시간까지 미뤄둘까. 속으로 그리 삼키며, 하즈키는 아케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 며칠 안 남은 1학년의 HR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수업시간을 보내고 소란스러운 쉬는 시간을 피해 복도로 나가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오늘은 유난히 배가 고프지 않아, 간식거리로 따로 챙겨온 빵을 꺼내 먹고 하즈키는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천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는 하즈키에, 옆자리에 있던 아이조가 조용히 눈길을 보낸다. 금방 알아챈 하즈키는 아이조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금방 고개를 돌린다. 곳곳에 서 있는 아이들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반을 나선다.

아직은 조용한 복도로 나오면, 하즈키는 한껏 숨을 들이마신다. 살짝 차가운 공기가 폐 안에 가득 들어차면, 하즈키는 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그대로 맞으며 걷는 복도는 기분이 좋았다. 구석에 있는 1학년 층을 빠져나오면 빵을 사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매점이 시야에 들어온다. 2학년 층과 가까운 매점에서는 역시 선배들이 가득했지만, 그 사이에서도 지지 않고 꿋꿋이 치고 들어가는 1학년도 보였다. 대단하구나. 하즈키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오늘은 빵을 따로 챙겨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락이라도 놓고 오는 날의 하즈키에게는 그야말로 이곳은 지옥이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밖에 떨어져 나갈 뿐. 그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지친 기분이 들어, 하즈키는 매점을 뒤로하고 중앙 계단을 오른다.

살짝 열린 옥상 문틈 사이로 새하얀 빛이 어두운 옥상 계단을 비춘다. 하즈키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밀어 열면, 그 작은 틈으로 들어왔던 빛이 하즈키의 온몸을 감싼다. 갑자기 하즈키에게 내리는 밝은 빛에 눈을 찌푸렸지만, 금방 표정을 풀고는 평소 항상 서 있던 펜스로 향한다. 온기 하나 없는 펜스를 잡으면, 차가운 온도가 손바닥에 머물렀다. 그것이 기분 좋아 양손으로 펜스를 잡고는, 학교의 풍경을 바라본다. 얼었던 나무가 녹고 싹이 자라고, 어느새 벚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을 받은 나무들이 살랑이며 춤을 추고, 벚꽃잎이 살랑이며 바닥에 내려앉는다. 여러 아이들이 벚꽃이 예쁘다며 그 아래서 놀고 있었다.

봄이면 사랑의 시작이라고도 하던가.

그래서 나한테도 이런 편지가 온 건가. 하즈키는 펜스를 잡았던 손을 풀고 팔을 올려 턱을 괸다. 몇 번은 더 봐왔던 사쿠라가오카의 풍경을 바라보며, 하즈키는 조용히 부는 바람을 맞는다. 봄의 바람은 상냥해서 기분이 좋았다. 겨울의 칼 같은 바람과 여름의 습기가 가득한 미미한 바람보다도 더욱 상냥하고 기분 좋게 다가와, 하즈키를 감싼다. 봄이란 계절은 참으로 좋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그간 정들었던 반과 작별한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학년이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교내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고 20분이 지나면서부터 들려오는 점심시간의 교내방송이었다.

학교 안에는 더 뚜렷하게 들릴 텐데. 하즈키는 그렇게 중얼이며 흐릿하게 울리는 교내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봄에 맞는 산뜻한 노래. 안녕하세요, 하는 오늘의 교내방송 담당자. 운동장을 한가득 차지한 채 축구를 하는 축구부. 눈과 귀에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담고 있으면, 옥상의 철문이 철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난다. 하즈키는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쇠의 녹슨 소리가 이어지고, 다시 문이 닫힐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린다. 옥상 문 손잡이에서 손을 떼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시바사키 아이조였다. 하즈키는 말없이 눈초리를 휘어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모습에 아이조가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하즈키에게로 다가온다. 옥상 제일 가장자리 구석에 서 있는 하즈키의 옆으로 다가오면, 하즈키와는 반대로 펜스에 등을 기댄 채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겨우 맞닿아있는 팔 하나에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하즈키는 웃는다.

“그나저나 어떻게 올라온 거야? 오늘따라 시끄럽던데.”

─곧 졸업이니까, 반이 달라지면 자주 못 봐서 그런가? 아케치 선생님도 갑자기 오늘 곧 졸업이니까 열심히 해라─ 같은 말도 했고. 하즈키는 고개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운동장을 바라본 채 아이조에게 묻는다. 아이조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두드리며 아, 그거. 하면서 작게 운을 띄운다. 고개를 하즈키 쪽으로 살짝 돌리며 작게 입을 열었다.

“그냥, 볼 일이 있다고 했지. 일이 있는데, 지금부터 생각하러 가야 하니까 따라오지 말아달라─ 같은. 사무실 일에 간섭하는 사생 급의 애들은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휴대폰을 바라보는 아이조를 바라보다, 우와 하고 하즈키는 작게 탄성을 내뱉는다.

“아이조 군, 거짓말 능숙해졌구나.”

“……아니거든.”

하즈키의 말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한 아이조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한다. 평소처럼 투덜대는 아이조의 행동이 즐거운지, 하즈키는 헤헤, 하고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린다. “아이돌의 여자친구라는 건 힘든 일이네~.” 하고, 하즈키가 문득 입을 연다. 갑작스러운 말에 아이조가 휴대폰을 보다 말고 상체를 틀어 하즈키를 바라본다. 옆에서부터 느껴지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하즈키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데이트도 함부로 못 하지, 어디 다닐 때는 전부 가리고 다녀야 하지, 인기 많지, 주변은 항상 소란스럽지, 게다가 학교에서도 같이 있을 수 없지, 사귀는 건 비밀이고付き合うのは秘密だし。 어쩌다 실수로 이야기하는 날에는 어떻게 될지 무섭단 말이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나하나 이야기한다. 손가락이 7번 접혔다 펴지고 나면, 하즈키가 아이조를 돌아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어. 이쪽이 나한테도 더 좋고.” 하고는 이를 보이며 잔망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아이조가 그런 하즈키를 보면서 옅게 한숨을 쉰다.

“모든 게 비밀이면, 이렇게 만나는 게 밀회密會 같기도 하고! 재밌으니까楽しいから。”

“……비밀이라길래 생각난 건데,”

아이조가 팔꿈치를 펜스에 올리며 말한다. “아침에 그거, 진짜 러브레터야?”

그 말을 듣고 하즈키는 문득 러브레터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이조가 그것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말이 끝난 뒤 다시 고개를 돌리는 아이조의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붉게 물든 귀에 하즈키는 눈을 끔뻑인다. 저도 모르게 뻗어진 팔은 멈추는 것보다 아이조의 머리카락에 닿는 게 더 빨랐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사락, 만져 귀를 건드리면 아이조가 어깨를 움찔이며 제 손으로 귀를 막는다.

깜짝 놀란 얼굴로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하즈키가 눈초리를 휘어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질투하는 거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블레이저 안쪽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낸다. 열어본 흔적도 없고 깔끔하기만 한 편지. 역시 답장하는 게 좋겠지── 일부러 끝을 늘리며 대답하고는 편지를 입가에 가져다 댄다. 사락거리는 봉투 소리가 들리다, 편지를 다시금 되잡는다. 그런 하즈키를 아이조는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바로 앞에 있는데 대놓고 고백편지에 대답하겠다니. 아이조 쪽에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닿은 손길의 온도는 분명 뜨거웠다. 하즈키의 손이 그렇게 뜨거웠던가. 아이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귀 끝을 만지작거린다. 그런 아이조의 행동을 하즈키는 가만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나간 손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도 없을 텐데.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며 하즈키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다시 맞추면, 아이조는 “……질투 같은 거 한 적 없어.” 하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이조 본인은 모르겠지만 하즈키는 알 수 있었다. 당황하면 말에 뜸을 들인다는 것을, 목소리에서 어색함이 묻어난다는 것을, 처음 목소리가 나올 때 떨린다는 것을. 그것을 알기에 하즈키는 더욱 장난스럽게 굴었다. 질투를 대놓고 하는 아이조는 평소에 보기 어려우니까.

“저기, 아이조 군, 편지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알까보냐!”

─그보다 답하지 마! 큰소리를 치며 아이조는 하즈키의 손에 들린 편지를 뺏어버렸다. 하즈키의 손에서 힘없이 빠져나간 편지가 아이조의 손에 의해 조금 구겨진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편지였는데. 앗, 하고 하즈키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버린다. 하즈키가 급하게 아이조의 손을 따라 손을 뻗는다. 운동

장을 향하던 몸이 빙글 돌아 안쪽으로 향하고,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하즈키는 괜히 애가 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다고 뺏어가는 게 어딨어!”

 

치사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며 대답하는 하즈키에게도 꿈쩍 않고 아이조는 하즈키가 다시 뺏어가지 못하도록 팔을 높게 뻗는다. 돌려줘! 아이조 군이 대답할 것도 아니면서!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필사적으로 아이조를 좇았지만 아이조는 그저 싫어. 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하즈키를 피한다.

조금만 하면 닿을 것 같은데.

 

한 손으로는 펜스를 잡은 채 발꿈치를 들어 편지가 들린 아이조의 손으로 뻗는다. 애매하게 닿지 않는 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문다. 아이조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아이조의 반응에 하즈키는 저도 모르게 진심이 되어 펜스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힘껏 뻗는다. 떨리는 손끝이 아이조의 손꿈치에 닿았다, 위태롭던 균형이 무너져 아이조 쪽으로 넘어진다. 우왓, 하고 다시금 소리를 내며 아이조의 어깨에 가슴팍에 손을 올린다. 까슬한 블레이저의 감촉이 느껴지고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지만, 더 이상 몸이 기울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면, 하즈키의 바로 앞에 당황한 얼굴을 하는 아이조가 있었다.

 

“……위험하게 뭐하는 거야.”

“그야, 아이조 군이 먼저 편지 가져갔잖아!”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아이조의 말에 대답했다. 하즈키가 넘어지지 않게 받쳐 준 아이조가 여전히 하즈키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둘은 신경 쓰지 않고 그 와중에도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바빴다. 애초에 나한테 답장 어떻게 할지 물어본 게 잘못이다, 갑자기 뺏어간 아이조 군이 나빴다, 계속 러브레터로 놀려먹는 하즈키가 나쁜 거다, 뭐다. 여러 말이 번갈아 오가고, 결국은 지쳐 입을 다문다. 아이조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든 손으로 이마를 누른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이며 하즈키를 바라본다.

“대답, 안 했으면 좋겠어?”

장난스러운 얼굴이 느릿하게 웃음으로 번지면, 아이조는 다시금 한숨을 쉰다.

“당연하잖아. 너 말이야, 남자친구가 앞에 있는데…….お前さ、彼氏が前にあるのに…”

아이조의 말에 하즈키는 방긋 웃는다. 아이조의 품 안에 가만히 안겨, 아이조를 올려다본다. 시선을 돌려 구겨진 편지를 보다가, “사실은,” 하고 운을 뗀다. 살짝은 짜증 난다는 듯이─질투에 가깝겠지만─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저를 빤 바라보고 있는 아이조를 보며 “그거, 읽어보지도 않았어.”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입술을 오므렸다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아이조의 반응을 찬찬히 바라본다. 인상을 쓰고 있어 좁혀져 있던 미간이 순식간에 힘없이 풀어진다. 아직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하? 하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세 당황한 표정이 되어, 아이조는 말없이 제 손안에 구겨진 편지봉투를 살핀다.

하즈키의 말대로, 편지 봉투는 아이조가 만져서 구겨진 것만 빼면 말끔했다. 입구에 붙여둔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뜯어본 흔적도 없었다. 그런 편지를 바라보며 아이조는 다시금 하즈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말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여자친구를 못 믿는 것인가요? 검지로 가슴팍을 툭 치면서 하즈키가 말한다.

“애초에 읽을 생각도 없었는데, 아침부터 계속 이쪽을 힐끔힐끔 보기나 하고! 편지를 들기만 하면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는 거 다 눈치채고 있었거든! 이 편지를 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나한테는 이미 아이조 군이 있고, 그것도 꽤 됐고……. 아이조 군이랑 사귀고 있다는 건 절─대 비밀이니까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한 거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대답을 해줄 수도 없잖아. 남자친구가 있어요~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래서… 차라리 안 읽기로 한 건데.”

천천히, 평소의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즈키는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는다. 그 틈에 아이조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와 다시금 편지를 둘러본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하면서 편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내려앉은 속눈썹을 아이조는 바라본다. 어쩐지 그저 놀림당한 것 같아, 너 진짜… 하고 작게 중얼인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서야 신경 쓰지 않았던 교내방송이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정말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문득 묻는 하즈키의 말에, 아이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린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구나!”

“……아니거든! 네가 그렇게 말해도 대답 안 할 거라고 알고 있었어.”

하즈키는 아이조의 뻔뻔한 태도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거짓말!”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