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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하게 피었던 꽃들도 저물고 어느 덧 여름이 성큼 다가왔네요. 조금씩 올라가는 온도에 여러분들도 많이 지쳐 있을 거 같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조금 싱그럽고 풋풋한 사연을 들고 와봤습니다. 큼, 안녕하세요. 저에겐 얼마 전 가까워진 선배가 있습니다•••]

[아, 그 선배와 가까워진 계기는 말이죠.]

무더운 여름을 장식하듯, 싱그럽게 피어나던 나뭇잎들이 하나, 둘 저물고 쌀쌀해진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의 시기였다. 낙엽이 지고 있다는 건  가을에 빠질 수 없는 학교의 대축제, 체육대회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이번 운동회 명단 좀 부탁할게."

리아의 담임은 이번 체육대회의 총책임자였으며, 어쩌다보니 이번 체육대회를 준비하는 조수로 리아가 선정이 되어버린 시점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선생님을 도와 준비하고 있던 리아는 어느 덧 준비에도 막바지에 이르러 마지막 명단 준비만을 앞두고 있었다. 각 반에서 참여하는 운동과 참여자를 정리하면 리아가 받아오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다음은 2학년 C반이던가?"

낮게 중얼거리며 걸어오던 리아는 조심스럽게 교실문을 열고 때마침 지나가던 선배를 붙잡아, "저기... 체육대회 명단을 가지러 왔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리아에게 잡힌 선배는 "어이, 나카하라. 체육대회 명단 가지러 왔다는데?" 라고 외치며 잠시만 기다리는 말과 함께 엎드려 있는 남학생에게로 다가갔고 리아는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리아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지더니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탓에 리아는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주황색 머리, 초록빛의 체육복,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상태와 잠긴 듯한 목소리. 그리고... 잘생긴 듯한 외모?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잠시 상념에 빠졌던 리아는 이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는 그가 건네는 종이를 받아들고 찬찬히 목록을 살펴보았다. 

"아, 여기 담당자 이름 적여주셔야 하는데..." 비어있는 목록을 가리키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얼굴로 "미안, 대신 좀 적어주겠어?" 라고 말하며 리아를 바라보았고, 리아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펜도 들고 있었고. 달칵, 펜을 한 번 누르고는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름은? 이러고 묻자 어느 덧 잠겨 있던 목소리가 풀려 돌아온 목소리로 말하는 이름에 리아는 고개를 슬쩍 들어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카하라 츄야, 라고 적어주면 된다."

씨익, 입꼬리를 당겨 매력적이면서도 어딘가 장난기가 가득할 거 같은 미소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리아를 사로잡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츄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둘의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했던 첫 만남이었다.

곧 있으면 열리는 체육대회를 앞두고 리아는 운동장부터 체육관까지 정리정돈과 함께 체육대회를 진행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하루면 끝나는 축제라지만 그 하루를 위해 준비하는 건 무수히도 많았다. 보통은 체육 선생님이라던가,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진행을 하고 있었지만 최근 바빠진 일정 탓에 종종 리아 혼자 작업을 하고 있을 때도 있었고, 리아의 담임은 그 점에 대해선 늘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리아, 많이 힘들지? 내일부터는 다른 녀석이 도와줄 거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돌아가기 전, 인사를 전하러 간 길에 들은 소식은 이랬다.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하니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듯 싶은데... 낯을 조금 가리는 리아는 여러모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 많은 일을 혼자서 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교문을 빠져나왔다. 이왕이면... 그 선배여도 좋을 거 같은데, 라는 가벼운 상상을 하면서.

"...え?"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리아가 보인 반응은 딱 이러했다. 더함도 덜함도 아니고 정말 그대로 굳어서 고개만 갸웃하는 상태. 선도부 회의가 있었던 탓에 조금은 늦어진 상태로 부랴부랴 체육관으로 달려갔겄만, 보이는 인영은 조금 당황스러운 상대였다. 주황머리, 걷어 올린 소매,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 분명 어제 자신이 생각했던 나카하라 츄야가 서있는 게 아닌가.

 

"너, 저번에 왔던 걔 맞지?"

한참을 굳어 생각에 빠진 리아를 깨운 건 츄야의 목소리였다. 얼이 나간 상태로 두 눈만 꿈뻑이며 있는 리아 앞으로 다가와 손을 휘휘 저어 보임에 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는 걸까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저 자신이 생각한 사람이 눈 앞에 있는 탓이라고 넘기며 츄야와 인사를 나눴다.

그 이후로 둘은 거의 매일마다 만나며 함께 일을 했다. 매일 만난 탓일까, 둘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고 일이 끝나면 교문에서 헤어지기 바빴던 둘은 어느 덧 서로의 집까지 데려다 주는 사이가 되었다. 말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창고 정리를 하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고, 점점 해가 짧아지고 있는 탓에 이미 어둑해진 길목을 가만히 보던 츄야는 아무래도 혼자 가는 건 위험하지 않겠냐고 말하며 리아를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츄야는 정반대의 리아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기를 반복하며 늘 마지막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츄야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니, 아닌 게 맞는 건가? 애초에 리아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게 힐끔힐끔 시선이 가는 것부터, 무심코 툭 자신의 머리 위로 올려진 츄야의 손에 심장이 두근하는 것까지.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좋아하게 될 만한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첫 눈에 반했다고 말하기엔....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첫 눈에 반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건가? 그런 것들은 전부 영화에 나오는 하나의 판타지 요소라고 생각하는 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기 어려웠다.

"이거 어쩌지? 세츠나가 발목을 다친 모양이야."

그래서 이번 2인 3각은 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연락이 왔네... 잠시 전화를 받고 온 담임은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세츠나, 원래라면 츄야의 파트너로 2인 3각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급작스러운 부상으로 공석이 되어버린 것이다. 급하게 다른 인원을 찾기엔 이미 할만 한 사람들은 다른 종목을 준비하고 있는 탓에 그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 서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쯤, 담임은 마치 좋은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손뼉을 치며 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아가 참여하면 되겠네!" 

에...? 리아는 동그란 두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체육에는 재능이 없어 처음부터 달리기 같은 종목은 피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줄다리기라던지 가벼운 쪽으로만 선택하고 있었는데... 리아는 두 손을 저어보이며, 극구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관이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고작 "하, 학년이 다른데 괜찮을까요?" 라는 말이 전부. 리아의 말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어차피 같은 白組이기에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는 대답이었다. 리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리아는 자신이 운동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2인 3각은 서로의 발목을 묶고 합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 말은, 묶인 발목부터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지는 거리까지 리아에겐 문제가 될 법한 것들이 가득했다. 최근엔 혼란스러운 마음이 깊어져 시선만 마주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 같았는데 2인 3각이라니. 금방이라도 묶인 발목을 풀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애써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 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발목, 괜찮냐?"

다정한 목소리. 다른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던 리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츄야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거 같지만 사실은 자상한 사람. 리아의 마음 속 츄야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겉보기엔 무서울 거 같지만 사실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유독 잘 챙기고, 걱정하고. 자신에게만 그러는 건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은 그랬다.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자상한 거라면... 일순간 울렁거리는 속에 낯빛이 어두워지자 츄야는 괜찮냐고 물었고 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고는 괜찮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감정이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츄야가 다른 이에게 자상한 건... 상상만으로도 싫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신이 츄야에게 특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리아였다.

소란스러운 운동장. 두 개의 팀으로 나뉜 학생들은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팀을 응원하기 바빴다. 오랜 여정 끝에 체육대회는 무사히 막을 열었고, 교장 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체육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코멘트에 리아는 조금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학년, 자신이 들어와 처음으로 열어보는 체육대회이니 유독 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2인 3각 외에 참여하는 운동은 없었기에 리아는 그늘진 곳을 찾아 편하게 앉아 있었다. 아직은 따가운 가을 볕을 피해 앉으면서도 두 눈은 열기가 가득한 운동장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머물러 있다기보단 익숙한 주황빛 머리카락을 찾기 바빴지만. 리아와 다르게 츄야는 평소에도 운동을 즐겨하고 있었고, 부활동마저도 운동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종목에 참여한다고 그랬었다. 대단한 사람... 작게 웅얼거리며 턱을 괴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츄야를 멍하니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문득 이쪽을 바라보고는 금방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행동에 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아직은 날이 뜨거운데, 덥진 않고?" 

조금은 눈이 따갑게 비춰졌던 햇빛을 가로막으며 리아의 앞에 선 츄야는 언제부터 들고 있었던 건지 모를 음료수를 건넸다. 시원한 온도, 자판기에서 뽑은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지는 온도에 리아는 캔 음료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굳이... 나에게 주려고 뽑은 건가? 나한테만? 아니, 아닐 수도 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타치바나 리아. 혼자 모래성을 쌓았다, 무너트렸다 반복하며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자 점점 어두워지는 낯빛에 츄야는 걱정스러운 듯 리아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며 "최근 무리한 거 아니냐? 안색이 안 좋은데... 보건실이라도 데려다 줄까?" 라고 말했다. 

이마에 닿아오는 은은한 온기에 리아는 마치 숨을 쉬는 법이라도 잊은 듯, 멍하니 굳어 있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두 손을 저어보았다.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선배 찾는 사람들이 많네요." 때마침 츄야를 부르는 목소리에 리아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는 츄야의 등을 떠밀듯 사람들에게로 보냈다. 리아에게 떠밀린 츄야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여러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리아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시합이 끝나면 이온음료라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사람들과 어울렸고, 츄야를 보낸 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풀썩 앉았다. 여름도 지난지 오래였지만 리아의 두 볼은 계절을 잊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까지도 제 이마에 남아 있는 듯한 온기를 제 손끝으로 느끼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다정한 온기... 지루하기만 했던 체육대회가 조금은 좋아지기 시작한 리아였다.

"못해도 괜찮으니까 부담 가지지는 말고."

자세를 낮춰 발목에 끈을 묶으며 츄야는 말했다. 함께 합을 맞출 시간조차도 부족해, 체육대회를 준비하는 틈틈이 몇 번 합을 맞춘 게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몇 번 해보지 못한 탓에 리아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자기 혼자라면 늦던, 넘어지던 뭐든 상관 없었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기에 혹시나 민폐를 끼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츄야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끈만 바라보는 리아를 보고는 픽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살짝 헝크리듯 쓰다듬었다. 늦어도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 말에 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츄야를 바라보았고, 츄야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실례." 한 마디를 내뱉더니 자신의 손을 뻗어 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이러는 편이 더 나을 거 같아서. 편하게 의지해라."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저 멀리 보이는 결승점을 바라보았다. 그 탓에 두근거리는 소리가 다 들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연신 쿵쿵 거리는 심장을 자제할 수가 없어 리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들키면 안 돼, 들키면 안 돼.' 라며 연신 웅얼거렸다. 무심한 건지, 아예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어떤 이유라도 자신이 말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후자의 경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리아였다.

걱정과 다르게 경기는 부상자 하나 없이 무사히 끝났다. 비록 1등은 하지 못했으나 나쁘지 않은 결과. 츄야도 마음에 드는 결과였는지 웃으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시원한 이온음료를 손에 쥐어줬다. "마시면서 쉬고 있어라. 난 다음 경기가 있어서." 츄야의 말에 리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에 걸터앉고는 물방울이 맺히고 있는 캔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기에 녹아 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런 열기를 식혀주는 거 같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첫 눈에 반한다는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하는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흥미는 생길 수 있다는 생각. 그럼 자신이 그날 츄야에게 느꼈던 감정은 흥미일까, 반한 것일까. 어떤 것이든 상관은 없었다. 캔에 시선을 고정했던 리아는 고개를 들어 광활한 하늘 아래, 즐겁게 뛰어다니는 츄야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츄야를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두근거림은 결국, 좋아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라는 이유로 선배와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체육대회는 무사히 막을 내렸고, 선배와 저는 그날 이후로도 하굣길은 물론, 주말에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구요. 저번 겨울 방학에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둘만의 여행은 아니었지만? 여튼, 선배에 대한 감정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선배도 같은 마음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청취자님들이 듣기엔 어떤가요? 혼자만의 짝사랑인 걸까요?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네, 사연은 여기까지 들어왔는데요. 글쎄요... 확률은 반반 아닐까요? 사연자님께서 선배의 마음에 궁금하시다면 직접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네요. 부디 서로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며 추천곡을 마지막으로 이번 라디오는 막을 내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아는 옥상의 난간에 기대 마지막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라.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었다. 물어보면 빠르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고. 그렇지만 지금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의 물음에 지금의 관계가 망가지는 게 두려워서 아닐까. 

"리아."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니, 뛰어다닌 건지 앞머리가 조금 젖은 채로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오는 츄야가 보였다. "한참을 찾았네."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츄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찾다니? 왜? 아, 설마. 순간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땀으로 가득한 자신의 두 손에 시선을 고정하다 고개를 휙 돌려 츄야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붉은 눈에 츄야도 놀란 건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왜?" 라고 물었고 차마 내뱉지 못하고 움찔거리던 리아의 입술이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라디오... 들었어요?"

"아, 당연한 거 아니겠냐."

교내 모든 스피커에서 나오는데. 리아의 뜬금없는 말이 웃기기라도 하는 건지 큭큭 웃으며 조금 더 거리를 좁힌 츄야에 리아는 더 복잡해진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를 듣고 자신을 찾아 다녔다는 건 둘 중 하나 아닌가. 거절이던가, 고백이던가. 아니, 애초에 고백을 한 적도 없으니 거절도 아닌 건가? 작게 한숨을 내쉰 고개를 푹 숙였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지만... 츄야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는 없었기에.

"그래서, 안 물어볼 건가? 기껏 대답 생각하고 왔는데."

자신과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리아를 빤히 바라보며 츄야는 입을 열었다. 용기가 나지 않는 거겠지. 츄야의 시선에 리아는 그랬다. 평소엔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 잘만 하면서 자신의 앞에서만 긴장한 티를 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하지 않았고, 억지로 질문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걸 츄야도 알기에 기다렸다. 하지만, 더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츄야의 말에 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츄야를 바라보았고, 츄야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긴장감에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스스로를 말리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선배는 저 어때요?"

저는 선배 좋아해요. 담담한 고백의 말. 결국 내뱉어진 말에 이윽고 정신을 차린 리아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두 볼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뱉어진 음성 뒤로 리아에게 주어진 건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과 그 탓에 생겨버린 과호흡.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눈이 시큰거렸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츄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원, 생각은 했다면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은 츄야는 가볍게 손을 뻗어 오랜만에 입고온 교복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 움직이더니 톡, 떨어지는 단추를 손바닥에 쥐며 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졸업은 아직 멀었다만, 역시 주인은 너일 거 같아서." 두 번째 단추,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는 게 풍습이라지? 담담하게 내뱉는 말은 온통 다정하게만 들렸다. 좋아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결국 모든 단어가 좋아한다로 연결되는 고백. 숨, 쉬어야지? 자신에게 건네진 단추를 바라보며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던 리아를 챙기는 건 역시나 츄야였다. 느리게 내뱉어진 숨결과 함께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제 손바닥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안도감, 기쁨 복잡하게 맺혀진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처럼 뚝뚝 떨어지는 울음에 츄야는 당황한 듯 허둥거리며 리아를 달래기 바빴다. "인마, 네가 울어버리면 어떡하냐. 울지 말고, 어?" 달래는 건 영 못하는데. 낮게중얼거리며 자신의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츄야에 리아는 고개를 휙 들어 츄야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들어올려진 고개에 츄야도 당황한 건지 멈칫하는 동작을 인식할 틈도 없이 리아는 "좋아해요, 선배." 고백을 했다. 

리아의 말에 놀란 츄야는 두어번 눈을 깜빡이더니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리아는 항상 이랬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진심. 그게 맞다고 생각이 들면 직진하고 보는 스타일이 귀여웠다. 츄야는 리아를 가볍게 당겨 끌어안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잔잔한 목소리. 츄야의 품 안에 안긴 리아는 절대 모를 사실이었지만 츄야의 귀끝이 붉어진 건 아마도 평생 츄야만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따뜻한 온기에 잔잔하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쌀쌀했던 가을과 유독 시렸던 짝사랑의 겨울을 지나 서로가 함께하는 봄 그리고 여름. 적어도 츄야와 함께라면 눅눅한 여름의 계절도 사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 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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