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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그녀의 교복 스커트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효테이 고등부의 기준복은 중등부의 것처럼 플리츠 스커트였는데, 색은 좀 더 어두웠지만 같은 체크무늬였다. 치마가 나풀거리면 잡아 정리할 법도 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짧지 않은 길이여서였을까? 그녀를 기숙사까지 바래다 주는 길, 나는 내 손 안에 잡힌 그녀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녀는 살짝 상기된 뺨을 한 채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카나가와의 릿카이대 부속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언제나 건강하고 성실하게 학교를 다녀 졸업식 날 정근상을 받은 그녀는 외부 수험을 보고 도쿄의 명문인 효테이의 고등부로 진학했다. 내 출석부는 길었던 투병 생활과 청소년 월드컵 참가로 구멍이 난 날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에스컬레이터제의 수혜를 받아 무사히 고등부로 진학할 수 있었다. 비록 훈련과 대회 참가 등의 일정으로 수업은 거의 듣지 못했고, 교실보다는 해외에 있는 날이 더 많다시피 했지만.

 

그래서 오늘은 더더욱 특별한 날이었다. 여름의 끝, 두 달만에 잡힌 데이트 약속.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나에게 그녀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면서. 영화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나와 카페로 향하는 길, 감상을 말하기를 망설이는 나를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은 그녀도 이 의견에는 동의했다. 영화는 전형적인 문학 풍의 일본 영화였고, 정적이었고 전개는 느릿했다.

손을 꽉 잡힌 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엉망이에요! 세이이치와는 좀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에 그녀의 미소가 별빛처럼 번져 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지었다. 잡은 손 안에서는 어렴풋이 여름의 향기가 났다.

 

"하지만, 그 배우의 연기는 좋았어. 왜 네가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정말이에요?"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해?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톡 건드렸다. 그녀는 옛날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부끄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렇죠? 그는 말이에요, 어떤 역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해내요. 오늘처럼 형편없는 배역을 받아도, 조금 어색한 연출의 무대에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해요. 그런 점이 좋아요. 살아간다는 건, 자신의 할 일을 다하는 거잖아요."

"주니어 테니스만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만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너는 언제나 완성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구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즐거우니까요."

 

그녀와 손을 잡고 걸으면, 자연스레 내 보폭은 예전처럼 줄어들었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전국대회의 3연패가 목표였던 나와 함께 그녀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기가 있어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마음이 다정하고 섬세해서 주변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길고양이에 쉽게 발걸음을 멈추고,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는 사람.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그녀도 많이 변했다.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테니스부였던 중학생 때와는 또 다르게 만날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이별은 훨씬 더 아쉬웠다. 기숙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걷던 그녀도 따라 멈췄다. 나는 잡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녀가 잡은 손을 풀어 내 뺨을 감쌌다. 나는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벌써 헤어지고 싶지는 않은데."

 

부드럽게 떨어지려는 손, 나는 그 손을 다시 잡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여름의 해바라기처럼 사랑스러운 미소로 나를 타일렀다.

 

"어쩌다 이렇게 어리광쟁이가 되었어요?"

"너에게만 그래."

"알겠어요! 30분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효테이 벤치에 앉아 보는 건 처음이라 좀 떨리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내 농담에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별의 유예를 받은 내 얼굴에도 미소가 퍼졌다. 나와 살짝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은 그녀를 본 내가 조금 몸을 당겨 앉자,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결 좋은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연한 샴푸 향기가 났다.

 

"네가 또 보고 싶을 때엔 어떻게 하면 좋아?"

"전화하면 되죠. 문자도 좋고요."

"그래도 보고 싶으면?"

 

그녀가 몸을 틀어 내 눈을 바라봤다. 마주본 눈은, 릿카이의 등굣길에 펼쳐진 바다처럼 푸른 녹색이었다.

 

"제 생각을 오래 해 주세요. 눈은 어떤 색인지, 머리카락은 어떻게 흘러내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저는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녹아내린 사랑을 느꼈다. 뺨에 키스하면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감았다.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만남의 기쁨이 있는 거잖아요. 그걸 견뎌내는 것도 관계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삶은 그런 거고요."

 

문장을 끝낸 그녀는 눈을 떴다. 그런 말을 한 주제에, 아쉬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손가락이 유독 긴 손은 내 손을 찾아 잡고는 놓을 줄을 몰랐다. 나는 미소를 띈 채 그녀에게 말했다.

 

"가끔 이상해. 나는 내 삶이 테니스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너를 보고 있으면, 모두 여기에 있는 것 같아."

"로맨틱한 말을 하시네요."

"정말이야. 코트 반대편에 선 누구보다 네가 특별해."

"에치젠 군보다요? 테즈카 군이나, 사나다 군보다?"

"이건 비밀이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듯 귓가에 낮게 속삭이자, 그녀는 살짝 몸을 뒤로 빼며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양 팔로 잡아당겨 안았다. 양 쪽 심장에서 고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너는 작게 꼼지락거리다 수줍게 나를 마주 안았다. 그 포옹은 언제나 따뜻해서, 나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게 했다.

 

"보고 싶으면, 전화해 줬으면 해."

"시차가 있을 때는요?"

"상관없어, 너라면 잠을 깨워도 좋아."

"제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아시죠?"

"그래도 나는 진심이야. 너에게는 언제나 그래."

"아, 별 보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정말, 뉘엿뉘엿 해가 진 하늘에 밝은 별 하나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독 밝구나, 금성일까? 그럴지도요. 다정한 대화가 오고간다.

 

"사랑해."

"저도요."

 

해가 짧아지는 것은 어째서 이렇게 아쉬울까? 사랑하는 이와 있는 시간은 왜 이렇게 짧을까.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향수의 잔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를 어르듯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부드러웠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입 안에서 말이 맴돌았다.

 

 

 

 

 

<OFF>

 

 

사립 효테이 학원의 중등부와 고등부는 본래부터도 도내에서 유명한 진학교 중 하나였다. 전통이 깊은 나머지 시설이 오래되었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넓은 학교 부지와 세련된 교복, 인근의 다른 학교들에 비해 높은 학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효테이의 중등부에 그 ‘아토베 케이고’가 입학한 지도 어언 3년. 학원의 시설과 시스템은 완전히 뒤엎였다. 그리고 당연한 절차처럼, 굴지의 대기업 ATB의 후계자, 영국 유학파, 소문의 풍운소년, 효테이의 태양 등, 수많은 수식어가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리더십을 뽐내며 중등부에서 3년간 학생회장직과 테니스부 부장을 연임한 뒤, U-17 청소년 대표 합숙에 선발되어 그곳에서도 중등부 캡틴으로서 세계를 손에 쥐었고, 가업의 승계를 위해 경영 유학을 간다던 교정의 소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고등부로 진학했다.

 

고등부 학생회장도 ‘아토베 님’ 이시겠지? 학원생들 모두의 기대와 동경의 시선을 업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등부의 학생회장이 되며 그의 이름이 건재함을 알렸다. 여름이 채 시작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어이, 유키무라."

 

그랬기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네? 나를 부른 건 다름아닌 '그' 아토베 케이고 군이었다. 물론 그는 나와 같은 반이었지만, 그가 내 쪽을 보며 턱을 괴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토베 군?"

"어제 학교에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왔다지."

"네?"

 

나는 혼난 아이 같은 심정이 되어 눈을 데구륵 굴렸다. 교칙상으로 안 되는 건 아닐 텐데? 효테이는 명문인 만큼 외부에서 오는 견학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외부인의 출입에 관대한 편이었다. 뭐, 들어와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순간 내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아, 혹시. 혹시!

 

"그것까진 상관 없다만, 애정 행각은 밖에서 다 하고 들어왔으면 한다."

"아, 아, 그게, 아니,"

 

어쩜 좋아, 누가 봤나 봐!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 나를 보는 아토베 군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꿰뚫어 보는 듯 차가워서, 시원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괜시리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본 아토베 군은, 유키무라 군과는 또 다른 단호함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대답은?"

"알겠습니다..."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웃으셨어? 완전히 놀림당했다는 생각에, 나는 부끄럽고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아토베 군 쪽을 보았다.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뭐, 그거면 됐어. 오랜만의 해후였던 모양이니."

"으... 죄송해요. 학교도 다르고 바빠서인지 두 달 만이라, 아무래도 헤어지기 어려워서."

"그 점도 참고해야겠군. 그 괴물 같은 녀석도, 컨디션 조절이라는 건 필요할 테니."

"네?"

 

아토베 군이 왜 그의 컨디션을? 나는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그런 나를 본 아토베 군은, 뭐야, 어제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가, 라며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쯤이면 떴겠지. 그가 나에게 보여 준 것은 하나의 인터넷 기사였다.

 

"유키무라 선수의 스폰서는 ATB로 정해졌다."

"네에?"

 

나는 무심결에 큰 목소리를 냈다. 어제는 얘기해 주시지 않았는데!

 

완전히 잊었던 모양이군. 아토베는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전화를 해 보려는 듯, 요엔이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는 오면 좋겠건만.

오늘도 평화로운 장거리 커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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