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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카쿄인은 교복 카라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낯설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노리아키, 다 입었니? 피팅 룸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쿄인은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틀어진 가쿠란 카라를 제대로 여미며 그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의 두 번째 고등학교 입학식이 성큼 다가왔다.
카쿄인은 익숙한 길을 어머니와 함꼐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교복이 든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집에서 꽤 먼데 잘 다닐 수 있겠니? 어머니가 걱정하며 물었다. 카쿄인은 빙긋 웃었다. 당신의 아들은 해외 여행 경험도 많은 걸요. 카쿄인은 이 말은 똑 잘라 두고, 잘 다닐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심약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어머니는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카쿄인은 제 어머니를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자신을 여기까지 잘 키워낸 것만으로도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카쿄인은 괜히 유쾌한 척 종이 가방을 앞뒤로 작게 흔들었다.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셨는지 웃으셨다. 그러나 카쿄인은 전혀 기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어째 매 순간순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갑갑했다. 이상하다. 나는 지금 매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데. 왜 이리 허전하고, 답답하고, 더 우울할까. 카쿄인은 더 이상 그 부분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수록 더 울적해질 뿐이니까.

집에 돌아온 모자는 각자 할 일을 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카쿄인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교복을 입었다. 눈에 익은 녹색 교복에 카쿄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설마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될 줄은 몰랐네. 카쿄인은 씁쓰름하게 웃었다. 거기에서도 똑같은 생활이 이어질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로 미뤄 보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다른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카쿄인은 가쿠란 겉옷을 잘 접어 침대에 올려 놓은 뒤 핸드폰을 켰다. 중학교 친구들이 라인을 보내오고 있었다.

-우리 잊으면 안 된다!
-넌 거기서도 잘 지낼 거야
-언제 시간 되냐? 입학식 하기 전에 우리 한 번 만나자

카쿄인은 메시지를 하나하나 읽은 뒤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당연하지. 어차피 우리 주말마다 만날 거잖아
-고마워. 너도 잘 지낼 거야
-좋아. 너는 언제 시간 있어?

카쿄인은 라인을 내리다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어디에도 익숙한 이름이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제일 간절한 이름. 사람에게 벽을 치고 있던 자신의 유일한 위안이었던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 세계에 그는 없는 걸까. 아니면 아직 자신이 만나지 못한 걸까. 카쿄인은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 계속 알림이 왔지만 카쿄인은 무시했다. 지금은 답하고 싶지 않았다.

“노리아키, 밥 먹으러 오렴.”

어머니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카쿄인은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도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문제 없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 때문에 눈물 짓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카쿄인은 핸드폰을 바라보다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정말 핸드폰을 종료하겠습니까?’ 안내창이 떴고, 카쿄인은 세 가지 선택지 중 ‘핸드폰 종료’를 선택했다. 곧 갈게요. 카쿄인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방문을 열었다.


02.


카쿄인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


비유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 카쿄인은 이것을 세간에서 말하는 ‘환생’이라 여기고 있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모든 게 전과 거의 같다는 부분이다. 이름도, 외모도, 부모님도, 심지어 살면서 일어난 일 대부분이 전생과 딱 맞아 떨어졌다. 스탠드는 없지만. 이 점이 전생과의 차이였다. 이전 삶에서, 카쿄인은 ‘스탠드’라 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타고났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스탠드는 카쿄인을 외톨이로 만들었다. 어린 카쿄인은, 자신은 평생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옆에서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몬마. 몬마 사유리였다. 그와는 7살이 되던 해 6월에 처음 만났는데, 한눈에 보아도 그는 눈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자신과 달리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사랑받았다는 티가 났다. 그만큼 몬마는 카쿄인에게 먼저 다가왔다. 불쑥 다가온 몬마에 카쿄인은 처음 경계를 내보였지만 몇 번을 더 만난 뒤에 카쿄인은 그것이 바보 같은 짓임을 깨달았다. 저렇게 상냥하고 강한 사람에게 계속 벽을 쳐봤자 자신은 얻는 게 거의 없을 것 같단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였기에 둘은 자주 마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시간도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났다. 중학교는 몬마와 함께 다녔고, 고등학교는 같은 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하교는 늘 같이 했다. 그것을 위해 몬마는 매일 카쿄인의 학교로 15분을 달려오는 기행을 저질렀다. 덕분에 둘은 카쿄인의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유명해졌다. 그건 카쿄인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으나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는 그저 친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이집트로 여행하면서,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엄청난 일을 연달아 겪으면서 카쿄인은 자신이 몬마를 이전과 다르게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우정이 발달한 형태의 애정인지, 아니면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투심과 소소한 욕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카쿄인은 죽었기 때문이다.


카쿄인은 그 최후를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다. 그건 지금도 그러하다. 카쿄인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고, 미련을 남기지 말자 다짐했다. 그러나 이제 와 그 삶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반추해보건데, 역시 마지막에 몬마에게 물어보지 않은 건 아쉬웠다. 그랬다 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고백으로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니, 그런 엉뚱한 전개가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생각을 해버리고 만다. 그때 붙잡을 수 있었다면. 확실하게 제 마음을 밝힐 수 있었다면. 그러면 더 완벽하지 않았을까.


카쿄인이 이 삶에서 몬마를 떠올리자마자 한 일은 그의 흔적을 좇는 일이었다. 그도 환생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곧 카쿄인은 큰 문제에 부딪쳤다. 몬마가 이전과 똑같은 이름으로 태어났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자신은 똑같은 외모에 똑같은 이름을 타고 났지만. 몬마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령 환생했다 해도, 자신과 동년배가 아닐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면 자신이 죽은 뒤 약 20년 뒤라, 몬마는 여전히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몬마가 환생을 믿을까. 너는 누구냐고 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걸 다 따지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 됐고 살아 있는지 어떤지만 알았으면 좋겠다. 카쿄인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고개만 겨우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살폈다. 지금은 3월 31일 오후 10시. 몇 시간만 지나면 개학식이다. 고등학생으로 두 번째 삶을 사는 거다. 이번 고등학교 생활은 얌전히 지나갈까. 아니면 그만큼이나 이상한 경험을 얻을까. 카쿄인은 일단 그 부분은 신경 쓰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

꿈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보았다. 긴 벤치에 쪼르르 앉아 있었는데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몬마가 앉아 있었다. 얼굴에 하얀 백합이 피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단아하게 앉아 있던 몬마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입가가 호선을 그리더니 그는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카쿄인이 되물었다. 그러나 몬마는 두 번 반복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그대로 꿈에서 깼다. 카쿄인은 시각을 확인하고 비명을 질렀다. 지각까지 10분 남은 시각이었다.


03.


새학기 첫날부터 이게 뭐람. 카쿄인은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정문이 닫히기 30초 전 뛰어들어 간신히 지각을 면했다. 그러나 쉴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신발장으로 향해 실내화로 갈아 신고, 배정받은 반으로 올라갔다. 왜 이 학교는 1학년 교실이 4층에 있는 거야! 카쿄인은 항의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삼키고 반으로 들어갔다. 마침 담임이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카쿄인 노리아키. 선생님이 이름을 호명하는 것과 동시에 카쿄인은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선생님은 카쿄인을 한 번 흘긋 바라보곤, 다음부턴 지각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카쿄인은 학우의 눈치를 보며 자리로 들어갔다.


담임 선생님은 뭐라고 더 이야기한 다음 강당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갔다. 몇몇이 카쿄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러나 카쿄인은 지각 후유증으로 인해 제대로 대답을 할 기력이 없었다.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긴 했는데 뭐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강당 안은 신입생과 그들의 학부모로 번잡했다. 카쿄인의 부모님도 시간을 내 왔을 거다. 카쿄인은 부모님을 찾아 둘러보는 아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얌전히 의자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게임으로 적당히 때울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남색 세일러복 상의와 하얀 테니스스커트 차림의 소녀였다. 푸른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었다. 뭐지. 굉장히 익숙했는데. 카쿄인은 의문의 소녀가 지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야, 너 어디 가!”
 

임시 반장이 카쿄인을 불렀다. 카쿄인은 화장실 좀 가겠다고 둘러대고 자리를 벗어났다. 뛴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뛰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카쿄인은 어느 때보다 절박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를 잃는다. 강한 예감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저기! 잠시만요!”
 

카쿄인은 사람을 밀치고 나아가면서 그를 불렀다. 다른 소음에 묻혀버렸는지, 아니면 일부로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그는 카쿄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급해진 카쿄인은 자신이 아는 이름을 불렀다.


“사유리!”
 

얇은 손목이 잡혔다. 소녀가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을 주조해 만든 듯 샛노란 눈이 카쿄인을 온전히 담아냈다. 틀림 없다. 이 소녀다. 고백하고 싶었던. 그러나 마지막 말을 끝내 전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 사람.
 

카쿄인은 문득, 제가 너무 세게 손목을 잡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급히 손을 놓으며 카쿄인은 차분하게 제 소개를 했다.
 

“카쿄인 노리아키라고 합니다. 그,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그러자 소녀가 빙긋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미소 짓는 소녀에 카쿄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무슨 뜻일까.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소녀가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할까? 텐메이.”

 

 

***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엔딩이 있다. 해피엔딩, 배드엔딩, 새드엔딩이나 데드엔딩. 그리고 조금 복잡하지만 메리해피엔딩이나 메리배드엔딩이란 것도 있다. 카쿄인은 늘 궁금했다. 만약 자신들이 겪은 일이 하나의 소설이 된다면, 그 엔딩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결국 최초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해피엔딩일까? 아니면 개인적으로는 슬프게 끝났으니 새드엔딩이라 해야 할까.
 

그날. 열린 창문으로 날아온 벚꽃잎을 사이로 첫사랑을 보며 카쿄인은 확신했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는, 명백한 해피엔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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