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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캐 과거 서사로 하는 날조가 중심입니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적어도 학교생활만은 조용히 지나가길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지겹도록 이사를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누군가가 알아볼까봐, 험한 말을 지껄일까봐 어머니는 노심초사했고, 어린 야마토는 그에 응할 수밖에 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중학교를 졸업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는 반 친구들 사이에서 느낄 만한 우정 따위를 거의 몰랐다. 그저 한 학년 위로 진급할 때마다 반에 있는 사람들 얼굴이 달라진다는 점과 성적을 올리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아는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2학년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2학년이 되어 이사 간다는 게 진학 문제를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닐지 모르지만 야마토는 저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눈을 보자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 자신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새 학교에 가는 첫날부터 비가 내렸다. 야마토는 되는 일이 없다고 중얼거리려다 어머니를 떠올리곤 가볍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뱉었다. 집 문을 열고 길거리를 걷던 그는 주변을 연신 살폈다. 이사 오고 나서 바로 집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파악하기는 했지만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다. 카페, 식당 같은 것들과 노래방을 지나가고 있을 때, 야마토는 뭔가를 발견했다.

 

“하이고, 니 그래가 감기 들겠다.”

 

걸쭉한 사투리가 들려와 조심조심 가까이 갔다.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리자 야마토는 의아해했다. 사투리 주인은 뭔가 고민하는 듯 하더니 제 손으로 땅을 몇 번 팠다. 동그란 구멍이 생기자 그는 망설임 없이 제가 쓰고 있던 비닐우산을 그 자리에 꽂았다.

 

“됐다. 니들 감기 안 걸리게 해 놨으니까 감기 걸리면 안 돼. 알았제?”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양이가 울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작게 터져 나왔고, 야마토는 그가 입은 교복을 보고야 제가 다닐 학교 학생임을 알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탓이었을까. 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숨을 들이켰다. 다홍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머리카락, 무쌍꺼풀이지만 또랑또랑해 보이는 연갈색 눈, 얇은 분홍색 입술. 야마토 앞에 있는 그는 말하자면.

 

“예쁘다.”

“흥, 뭐 그래 쳐다보나 했더니 한다는 말이 그거가?”

 

그는 불퉁하게 대꾸하긴 했어도 싫지는 않았는지 얼굴 가득 열이 올라 있었다. 야마토는 대꾸를 듣자 화들짝 놀라 그 쪽으로 우산을 씌웠다. 어리둥절해하던 그가 야마토를 보았다.

 

“그, 고양이들 감기 안 걸리는 대신 네가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야마토가 ‘너’라고 말한 건 명찰 색을 보고 저와 동갑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난죠 하나비’라고 적혀 있는 명찰이었다. 이름도 잘 어울리네.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나비가 말했다.

 

“됐다.”

“어?”

“니 써라. 난 비 맞는 거 좋아하니까.”

“안 돼. 그러다 정말 감기 들어.”

“괘안타고, 니카이도.”

“야마토라 불러도 되는데.”

“그래, 그래. 야마토. 아무튼 감기 걸려도 괘안타.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라.”

 

하나비가 그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자 야마토가 하나비 쪽으로 몸을 틀고 말했다.

 

“하, 하나비!”

“와.”

“오빠 마음이 안 편한데, 정말 비 맞고 그냥 갈 거야?”

“언제 봤다고 오빠고!”

“이제 봤잖아. 적어도 5분은 봤을걸.”

“하아.”

“빌려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같이 쓰고 가자는 건데. 안 돼?”

 

하나비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여기서 서두르지 않으면 무조건 지각이다. 실랑이를 벌였다간 풍기위원회에 걸릴 게 뻔했기에 하나비는 야마토에게 말했다.

 

“이번 한번만이다. 지금 안 가믄 학교 늦어.”

“네네. 갑니다. 자, 이리로.”

 

하나비가 우산 안에 들어오자 야마토는 안심한 얼굴로 그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하나비가 젖지 않게 조금 몸을 당기려 손을 뻗으니, 하나비는 조금 머뭇거리다 야마토에게 바싹 몸을 붙였다.

 

하나비가 모르는 녀석과 찰싹 붙어 등교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교로 퍼졌다.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고 교실에 들어가는 그를 보며 같은 층 학생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그 같이 들어온 학생이 전학생이고, 이제부터 하나비와 같은 반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들은 내심 야마토를 경쟁상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나비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모두 눈길을 돌리게 만드는 미인이었기에 눈독 들이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하나비는 귀찮다며 전부 물리쳤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비가 누군가와 함께 등교했다는 건 이례였다. 자꾸 누가 매섭게 쳐다보는 것 같은데. 야마토는 사정을 알지 못했지만 뜨거운 시선 때문에 뒷머리를 긁어야 했다.

 

담임교사가 야마토를 소개해주기 무섭게 야마토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하나비는 야마토를 흘끔거리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그냥 가겠다고 한 건데 야마토는 남 속도 모르고 우산을 씌워줬으니. 하지만 뭐, 저도 이렇게 될 줄 알고 다가갔고, 어쩔 수 없나. 안경 렌즈를 닦던 하나비가 짝에게 물었다.

 

“니 숙제 다 했나?”

“난죠 숙제 못했어? 내가 빌려줄까?”

“아이고, 됐다. 나도 다 했다!”

 

뒷자리에 있던 학생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하나비가 말했다. 왜 갑자기 숙제 이야기를 꺼내나 싶었던 야마토는 금방 제 주변에 몰렸던 학생들이 제게 멀어지자 이유를 알았다. 저를 둘러싸던 이들은 순식간에 하나비 곁으로 갔다. 하나비는 주변 학생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말을 걸었고, 몇몇 이들은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연신 눈을 반짝거렸다. 인기 많네. 하나비에게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야마토는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하나비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두게 하지 않았다.

 

야마토가 전학 이후 하나비를 관찰하며 느낀 건 그가 예상 외로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하나비는 그다지 애교 가득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타인에게 말을 잘 걸기는 하지만 ‘특별한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 듯했다. SNS도 잘 하지 않는 것 같고 교내에서도 먼저 말을 걸어 오는 이가 없으면 혼자 시간을 보냈다. 식사 시간이나 체육 시간 같을 때가 그에 해당됐다. 저보다도 훨씬 이방인처럼 구는 하나비를 보며 야마토는 호기심을 쌓아 갔다.

 

“귀찮다. 절로 가.”

“섭섭하네. 안 괴롭힌다니까.”

“점마들이 심판 필요하다고 니 불렀잖아!”

“안 가. 심판 봐 줄 녀석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왜 내가 가.”

“말 드럽게 안 듣네.”

“난 하나 심심할까봐 그렇지.”

“지가 심심함서 내 탓은.”

“들켰어?”

“에휴.”

 

야마토가 한 말에 하나비는 마뜩찮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가 다가오는 걸 딱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반 아이들은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운동을 하거나 여러 명이 모여 수다를 떨었다. 그 안에 어느 것도 하지 않는 야마토와 하나비가 있었다. 조금 툭탁거리던 그들은 그늘에 앉은 채 운동하는 이들을 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땡볕에서 잘도 뛰어다니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하나비가 야마토에게 물었다.

 

“니 진짜 절로 안 가도 되나?”

“오빠도 귀찮은 거 딱 질색이거든요. 안 가.”

“그래라.”

“어라, 이제 오빠더러 가란 소리 안 할 건가보네.”

“하이고, 인마는 쫑알쫑알 말만 드럽게 많아가 뭐에 쓸까?”

“별로 쓸 데 없을 텐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에 하나비를 본 야마토였다. 하나비는 다소 심각해진 표정으로 야마토를 보고 있었다. 말실수였다고 얼버무리려던 그는 하나비가 뒤이어 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니는 와 나랑 똑같은 눈을 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하나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샘이 오라 칸 거 못 들었나.”

“아, 그랬어?”

“가자.”

 

하나비 말에 야마토는 고분고분 따라 나섰다. 체육복을 갈아입고 이후 수업을 들을 때까지 하나비는 그와 관련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체육 시간을 마지막으로 이 날은 야마토도 선뜻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미술 시간을 지루해하던 야마토에게 꽤 곤란한 일이 생겼다. 가족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추상화로 표현하는 게 수업 내용이었다. 추상화라고 한다면 뚜렷한 형태가 없어도 됐지만 문제는 야마토가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선뜻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옆에 앉은 하나비를 보았다. 도구는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고 아무거나 써도 좋다는 허락은 이미 떨어졌다. 하나비는 창밖을 보더니 이내 난색 물감을 붓에 묻혀 줄을 긋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줄은 원이 되기도 하고, 물결이 되기도 했다. 곧잘 그리고 있는 하나비 옆에 있자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야마토도 붓을 들었다. 하나비는 난색을 다 썼는지 이번에는 한색을 썼다. 파란색 위주로 원을 그리던 그는 돌연 검은 물감으로 한색 그림에 죽죽 줄을 긋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멀거니 그를 보고만 있노라니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비는 별 다른 말없이 야마토에게 물었다.

 

“니도 이거 쓸래?”

“어, 아. 나는 좀 이따가.”

“그래라, 그럼.”

“하나는 다 했어?”

“그래 오래 걸릴 필요가 있나?”

“뭐, 하긴 그러네.”

 

에라 모르겠다. 야마토도 그냥 집히는 대로 물감을 붓에 묻혔다. 어지러이 그려지는 선들 위에 검은색을 덧대니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후련한 마음이 들어 그는 그림을 말렸다. 수업 후 점심을 먹기 전, 잠시 교실에 들러 짐을 내려놓은 야마토에게 하나비가 물었다.

 

“밥 같이 묵을래?”

 

하나비가 누군가에게 밥 같이 먹자고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모두가 야마토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을 느낀 그는 슬쩍 그들을 보고 다시 하나비 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억였다.

 

두 사람이 밥을 먹는 건 같은 학년 학생들에게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인들이 흥미 있어 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 모습에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들은 금방 싫증을 내고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주변이 조용해지고야 하나비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응? 뭐가?”

“아무것도 안 물어본 거.”

“아아.”

 

검은 물감으로 줄을 그은 이유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챈 야마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하나가 하고 싶었던 거잖아?”

“엉?”

“검은 물감으로 그린 거, 하나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하나비는 또 말을 잃었다. 아까는 남들 시선 때문에 말을 아꼈다면 지금은 야마토 이야기에 대답을 고르는 듯 신중했다. 수저질도 멎었다. 식판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올라왔다. 그리고 같이 올라온 건 젓가락이었다. 웬 젓가락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야마토 입 속에 무언가 들어왔다. 씹으면 씹을수록 포삭포삭한 감촉이 느껴지는 게 감자조림인 모양이었다. 그가 감자를 다 씹어 삼킬 때까지 하나비는 기다렸다.

 

“마음에 안 들어.”

“응? 오빠가 왜 마음에 안 들어?”

“다 안다는 듯이 굴믄서 와 말을 안 하는데.”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오빠는 귀찮은 게 싫어서.”

“하?”

“일일이 다 개입하고 나면 피곤하잖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 하나비는 아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야마토를 불쾌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야마토가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하나비는 다 먹지 않은 식판을 들고 정리대로 가 버렸다.

 

“니는 최악이야.”

 

라는 말과 함께.

 

점심시간이 지나고부터 하나비는 야마토를 완전히 무시했다.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는지 야마토는 알기 어려웠다. 다만 제게 최악이라는 말을 뱉던 하나비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기에 그도 무어라 말하지 못할 뿐이었다. 찜찜한 기분으로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갔더니 어머니가 기쁜 목소리로 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가 나서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며 이제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잘 됐다는 말을 뱉기는 했지만 야마토는 여전히 찜찜함을 거두지 못했다.

 

그 찜찜함은 학교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하나비가 저를 피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이동 수업 때도 저와 멀리 떨어져 앉고, 마치 야마토는 없는 사람인 양 무시했다. 교과부장 일을 하는 경우에만 말을 걸었고, 그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저와 눈이 마주치면 팩 고개를 돌려버리는 행동을 보고 있자면 야마토는 두려웠다. 이러다 영영 하나비가 자신을 봐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치고 올라왔다. 말해야만 했다. 사실은 처음 하나비에게 다가간 게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호기심에 흔들리는 자신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게 무슨 마음인지 지금도 몰라 하나비를 아프게 하고 말았다고.

 

그 말을 들려주려 하나비를 찾은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하나비에게 누군가 다가가는 게 보였다. 명찰 색을 보아하니 한 학년 선배인 듯 했는데, 그는 하나비를 향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비는 난감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살포시 밀어냈다. 그리고 도서관을 재빨리 나오다 야마토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하고 놀란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이번에는 야마토가 먼저 자리를 피하려 했다. 슬픈 얼굴만은 보기가 힘겨웠다. 고개를 돌리고 교실로 돌아가려던 찰나, 하나비가 말했다.

 

“알아.”

“어?”

“니 귀찮은 거 싫어하고, 귀찮은 거에 사람도 포함된다는 건 안다고. 아니까 이러는 거야. 나 때문에 내가 다치는 게 싫어가.”

“하나.”

“아, 하나만 부탁하자.”

“뭔데?”

“애칭으로 부르지 마라, 이제. 불편하다.”

“아.”

“먼저 간다. 밥 맛있게 무라.”

 

하나비가 먼저 말을 걸어옴에 기뻐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야마토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애써 웃으며 자리를 피하던 그가 눈에 밟힐 뿐이었다. 하나비 말은 반만 맞았다. 저는 사람조차 귀찮아하는 사람임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를 운운하며 저에게 이런저런 부탁하던 이들을 생각하면 그랬다. 그러나 그 감정이 단순한 귀찮음은 아니었다. 야마토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온 마음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순정은 왜곡되어 조롱받곤 했다. 온갖 손가락질을 받다 보니 자연스레 이어졌던 이사와 전학. 야마토는 생각했다. 진심을 전부 보이면 그것을 이용하는 이는 꼭 하나는 나타나고, 그것은 언제 제게도 닥쳐올지 모른다고. 그래서 처음 하나비를 만났던 날, 그가 고의로 고양이와 노는 모습을 보였던 건 아니었을지 의심하기도 했다. 제 주변에 있는 이들은 야마토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 천지였으므로 그가 보인 행동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비는 모르고 있었다. 제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고, 무슨 생각을 품으며 살아왔는지 단 한 가지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제가 간간이 보인 호의에서 작은 진심을 찾아냈으리라. 야마토가 귀찮다고 말했을 때 지었던 상처 받은 표정이 그걸 증명했다. 하나비가 말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다치는 게 싫다고.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도 야마토는 그를 잡아야 했다. 애써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해야 했다.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였다. 야마토는 하나비가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렸다. 달리기 실력이 좋지 않은 하나비라 쉬이 잡힐 테지만 그는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그가 익숙한 머리칼을 발견했다. 다홍빛에 검은빛이 섞인 묘한 머리카락 색. 야마토는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이를 품에 안았다. 안긴 이는 멈칫하긴 했지만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

 

“밥 안 묵나?”

“미안해.”

“니가 사과할 게 뭐 있는데. 나 혼자 맘 상한 건데.”

“하나 마음이 상한 거 결국 나 때문이잖아.”

“내가 니한테 아까.”

“알아. 애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한 거 들었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기 싫은 거야.”

 

하아, 하고 짜증 섞인 한숨이 들렸다. 홱 고개를 돌린 하나비가 야마토를 보았다. 말투에는 다소 신경질이 느껴졌지만 야마토는 여전히 안은 팔을 놓지 않고 있었다.

 

“화 내.”

“엉?”

“나 이제부터 하나한테 진짜 잘못만 할 거니까 그럴 때마다 화내라고.”

“니 내 성질 돋우러 왔나!”

“나 앞으로 하나한테 모진 언행 하는 거 말고 나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하나 주변에 있는 사람 마음에 안 들면 티 다 내고, 하나가 나 피하면 피하지 말라고 화낼 거야. 하나한테 닿고 싶으면 지금처럼 이렇게 안을 거야. 물론 이건 허락을 받겠지만.”

“니가 얼라가?”

“난 어떻게 해야 하나한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모른단 말이야.”

 

하나비가 순간 말을 잃었다. 야마토는 최대한 제 진심을 담은 눈빛으로 하나를 마주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하나비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는 하나한테 느끼는 거 솔직하게 다 보여줄 테니까 먼저 피하지 말라는 거야. 하나가 날 피한 일주일 동안 여기가 쿡쿡 오빠를 찔러댔단 말이야. 오빠 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화 내. 그래도 되니까 피하지만 마. 응?”

 

야마토가 조심스레 하나비 손목을 쥐어 제 가슴께에 올렸다. 손바닥 위로 심장 뛰는 게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랐다. 그가 봐 주지 않던 일주일 동안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알아달라는 채근 섞인 행동이 이어져도 말이 없던 하나비는 점점 눈물을 보이더니 이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야, 이 나쁜 놈아!”

 

야마토는 놀라 커진 눈을 하다 엉엉 소리 내어 우는 하나비를 다독였다. 울음소리가 커지고 있었지만 그는 차마 울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등만 토닥이고 있었다. 울면서 제 품에 파고드는 하나비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오빠 나쁜 놈이야. 아주 글러먹은 놈이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마음에 안 들면 화내기야.”

“누가 니 마음에 안 든대?”

“어?”

“에잇, 진짜. 인나! 밥이나 무러 가게.”

“저기 말이야, 그래도 나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좀 유지하면 안 돼?”

“시끄럽다!”

“아, 알았어. 알았어. 자, 이제 그만 울고 오빠랑 밥 먹으러 가자.”

 

야마토는 안긴 팔을 풀고 하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 울어 눈가가 퉁퉁 부은 하나비가 안쓰러워 눈가를 닦아주려 내밀었는데, 제 손에 한기가 들이찼다. 보드라운 손에 있는 차가운 감촉에 야마토가 손을 꼭 쥐었다.

 

“손이 너무 차다.”

“냉증 있어가 그렇다. 가자.”

“오빠가 눈물 닦아주려 했는데.”

“이제 다 그친 걸 닦아줘가 뭐에 쓸라고.”

 

불퉁하게 나온 말이었지만 하나비는 손가락을 조금 꼼질꼼질 하더니 이내 깍지를 꼈다. 손만 잡았을 뿐인데 그가 많이 진정한 것 같아 야마토는 속으로 안도했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지. 그는 앞으로 하나비에게 조금씩 속내를 드러내리라 마음먹었다.

 

약속한 대로 야마토는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비가 원치 않는다고 한다면 그만둘 생각이었으나 그도 별 이야기 없이 야마토를 가까이하고 있었다. 우선 호칭이 달라졌다. 하나비를 ‘하나’라고 부르던 야마토가 ‘낫치’라고 호칭을 바꿨다. 하나비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어느 날, 가족들이 그를 ‘낫쨩’ 혹은 ‘낫 언니’라고 부른 게 계기였다. 아직 바꾼 이유를 말한 적은 없지만 하나비는 별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마토가 내미는 손을 잡고, 같이 식사를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이동 수업에는 자연스레 짝이 되고, 체육하다 자유시간이 생기면 야마토는 으레 당연하다는 듯 하나비 무릎을 베고 누웠다. 처음에는 남학생들이 야마토가 대체 뭐기에 하나비 무릎을 베느냐고 못마땅해 했지만, 시간이 지나 하나비가 조는 그를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미 둘 사이에는 묘한 관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다. 언젠가 자는 체 하고 하나비 무릎을 벴을 때, 야마토는 하나비가 건네는 부드러운 손길에 제 마음이 젖어드는 것 같았다. 껌딱지마냥 붙어 다니는 동안 하나비는 알게 모르게 야마토에게 다정해졌고, 야마토는 그 다정함을 놓기가 싫었다. 오로지 하나비가 자신에게만 손길을 내주길 바라는 마음이 날로 커졌다.

 

그 날은 수업이 끝나고 다들 집에 돌아갈 찰나부터 비가 내렸다. 하나비는 빗방울이 떨어질 때부터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야마토는 그를 보다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낫치, 무슨 생각해?”

“비 맞고 싶다.”

“기각. 감기 들어.”

“그렇겠제.”

 

하나비는 그 말을 듣고도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민거리라도 있는 듯 진지한 표정에 야마토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가 비 맞지 못하게 해서 화났어?”

“아이다.”

“그러면 왜 그러는 거야?”

“됐다. 그냥 보고 있는 거다.”

“별 거 없으면 말고.”

 

하나비는 창가에 두고 있던 시선을 야마토 쪽으로 잠시 돌리더니 이내 주위를 살폈다. 담임교사도 없고, 반 학생들도 집에 간다며 먼저 반을 나선 후였다. 야마토와 하나비밖에 없는 교실을 빙 둘러 보던 하나비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야마토도 그런 하나비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 빗줄기가 거세지는 게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낫치.”

“응.”

“비 많이 올 것 같은데 슬슬 집에 가야 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덜 올 때 가야 비 덜 맞지.”

“아.”

“역시 비 못 맞게 해서 섭섭한 거지? 낫치 비 맞는 거 좋아하잖아.”

 

빗줄기에 가려지긴 했지만 희미하게 실루엣이 창가에 비치는 줄도 모르고 야마토는 하나비 기분을 풀어 주겠다며 실없는 소리를 할 참이었다. 그 때, 하나비가 말했다.

 

“얌토야.”

“어? 나?”

“여기 니 말고 누가 있는데.”

 

한 학기 남짓 함께 다니면서 하나비는 한 번도 야마토를 애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야’ 정도로 가볍게 부른 적은 있지만 낯간지러운 애칭으로 부른 건 처음이라 야마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나비를 보고 있었다.

 

“어, 어. 그렇지. 나 말고 낫치 옆에 아무도 없지. 그런데 왜?”

“이따 우리 엄마가 데리러 온다 캤거든. 니도 데리다 준다고. 그럼 엄마 올 때까지 여서 비 내리는 거나 보고 있을까?”

“아, 뭐야. 그런 이야기였어? 오빠는 찬성.”

 

싱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비답다 생각하며 야마토는 하나비에게 붙어 앉았다. 제가 내미는 손을 하나비가 맞잡았다. 빗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교실에서 단 둘이 손을 잡고 있자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야마토였다. 빗방울이 굵어져도 하나비 어머니가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크게 개의치 않아졌다. 하나비와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보던 빗줄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한참 창밖을 보고 있는데 하나비 손가락이 뺨을 쿡 찔렀다. 무슨 일인가 해 돌아본 순간, 부드러운 것이 제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하나비를 보자 상기된 얼굴에 야마토를 향한 수줍음이 담겨 있었다. 몇 번 오물거린 입술이 속삭임을 들려주려 하니 야마토는 그것을 막았다.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하나비에게 몇 번이고 다녀갔다. 하나비는 눈을 감고 야마토가 주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짧은 입맞춤이 그치고 나서 하나비는 야마토 어깨에 기댔다. 좋아한다는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리자, 야마토는 다시 하나비 입술에 다녀갔다. 길다면 긴 한 학기 만에 둘 사이에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하나비 전화가 울릴 때까지 둘은 서로에게 기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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